기름값 '착시적 안정' 공급부족 지금부터
식품 포장지 등 석유 원료제품 다 비싸져
농업·건설 균열 속 반도체 성과급만 관심
석유 의존하는 우리 사회 살펴야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

AD
원본보기 아이콘

봄날을 즐기려는 사람들과 차들로 가득 찬 공원과 도로의 주말 풍경은 여느 때와 같았다. 하지만 뭔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몇 주유소 앞에 길게 줄을 선 풍경이다. 다른 곳보다 ℓ당 40원 정도 저렴한 주유소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혼잡이 빚어졌다. 2월28일 시작된 이란 전쟁이 2주간의 휴전을 맞이하면서 이제 모든 것이 잠시 안정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른한 봄날의 틈새로 위기는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혔지만 휘발유 가격이 ℓ당 2000원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정부의 최고가격제 실시와 더불어 여러 완충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올해 1월 원유 및 석유류 제품 재고가 사상 최고 수준이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전쟁 발발 이후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신속하게 진행된 대규모 비축유 방출도 원유 수급 차질로 인한 영향을 완화해 주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 직전에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서 운항하던 유조선들이었다. 중동 산유국에서 원유를 선적하고 아시아 주요 국가에 도착하는 해상운송 과정은 약 2~4주가 소요된다. 3월 말까지는 계속 중동산 원유가 우리나라에 도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3월20일 이라크를 떠났던 유조선이 마지막으로 도착하고서 한동안 중동산 원유 공급은 중단됐다. 일본의 경우도 4월3일 도착한 유조선을 끝으로 더 이상 중동에서의 공급은 없다. 공급 자체가 본격적으로 감소하는 시기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모든 것의 가격은 오르고 있다. 식품 포장지부터 시작해 병원의 일회용 주사기까지 석유를 원료로 만든 모든 것이 비싸지고 부족해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런 충격은 가장 약한 곳부터 아프게 다가온다. 대표적인 분야가 농업이다. 파종기를 맞아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농업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료, 비닐, 플라스틱 그리고 경유다. 모종이 담겨 있는 육묘용 트레이부터 잡초를 방지하기 위해 까는 멀칭용 비닐까지 다양한 재료의 비닐과 플라스틱이 대량으로 사용된다. 현장에서는 30~50%씩 올라간 가격에도 물건을 구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농사에 필수적인 비료도 가격이 오르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질소 비료 가격은 한 달 전보다 35.2%, 작년보다는 168.6% 올랐다. 당장은 작년의 재고와 이미 계약된 물량을 통해 농사를 시작하지만 앞으로의 상황은 예측할 수 없다. 농산물 가격 상승뿐만 아니라 농가 부도와 파산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의 눈은 여기까지 미치지 않는다.


서울 용산구의 한 주유소 가격에 휘발유·경유 가격 안내문이 놓여 있다. 윤동주 기자

서울 용산구의 한 주유소 가격에 휘발유·경유 가격 안내문이 놓여 있다. 윤동주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건설 현장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레미콘은 시멘트와 자갈, 모래와 물로 구성되지만 혼화제도 반드시 첨가돼야 한다. 혼화제의 비율은 1~2%에 불과하지만 콘크리트의 유동성을 확보하고 굳는 속도와 강도를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없으면 품질 기준을 맞출 수 없다. 혼화제는 나프타에서 추출된 에틸렌으로 만들어진다. 나프타 가격은 2배 이상 상승했으며 물량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상황이 유지되면 5월 초에는 혼화제 재고가 바닥날 가능성이 높다. 건설 현장이 멈춰서는 것이다. 농업 현장과 마찬가지로 건설 현장도 다량의 석유화학 제품들이 사용된다. 내장재, 단열재 등 많은 주요 건설자재는 석유에서 만들어진다. 자재 부족으로 공사 현장이 멈춰서더라도 타워크레인 임차료 및 보험료 등 각종 비용은 매일 지출된다. 공사가 중단되면 기성금(공사 진척에 따른 중간 정산금)도 지급되지 않는다. 자금력이 취약한 협력업체들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건설업의 위기는 서민경제 전반으로 파급된다. 가뜩이나 소비 위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은 더욱 취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각 부문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많은 사람은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는 수출액과 주가 그리고 10억원을 넘는다고 하는 반도체 업계의 성과급에 관심이 쏠려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에게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유가 상승의 영향은 2000원대의 휘발유 가격으로만 체감되지만 조만간 큰 충격이 밀어닥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책은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소극적이다. 큰 문제가 없음을 강조할 뿐 정작 닥쳐올 위기와 충격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위기를 과장해 불필요한 공포심과 사재기 등 경제적 충격을 가져오는 것은 피해야겠지만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서 책임 있는 관계자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면서 주의를 환기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당장 미국과 이란이 전쟁을 끝내고 호르무즈 해협을 개방하더라도 예전으로 돌아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원유 및 액화천연가스(LNG) 생산 시설이 피해를 봤고 생산이 중단된 유정과 가스정의 생산능력 역시 감소한 상태다. 카타르가 5년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에 대한 LNG 공급을 중단한다고 불가항력을 선언한 것처럼 복구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중동지역에 의존하고 있던 황, 암모니아 등 각종 산업용 원료 가격도 고공행진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당장 원유가 부족하니까 아껴쓰자는 단기적 대책을 넘어서 전체 공급망과 사용 패턴을 점검하고 보다 효율성을 기할 수 있도록 정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항상 위기가 닥치면 충분한 대비와 비축이 부족했음을 탓하는 기사가 넘쳐나지만 상황이 종료되고 난 이후에는 아무도 챙기지 않는다. 원유를 더 구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석유에 의존하는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면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한 분야들을 챙겨보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정한 위기와 충격은 봄 햇살처럼 우리 곁에 이미 다가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AD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글로벌 정책·법률)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