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치유농업, 노년을 위한 사회적 처방
노인 우울 해법 떠오른 '사회적 처방'
자연·활동·교류 결합된 치유농업 주목
복지 연계 통한 지속 가능 서비스 필요
한국 사회는 이미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단순한 통계를 넘어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라는 삶의 질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노인의 정신건강은 가장 취약한 영역이다.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 10명 중 1명 이상이 우울 증상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은 단순한 기분 저하가 아니다. 공허감과 무기력, 관계 단절로 이어지며 삶의 의욕을 떨어뜨리고, 심해지면 수면장애나 기억력 저하, 극단적 선택의 위험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노인의 우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가 함께 대응해야 할 사회적 과제다.
노년의 우울 뒤에는 대개 '고립'이 자리한다. 은퇴 이후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인간관계가 약화할수록 우울 위험은 커진다. 해법 역시 관계의 회복에서 찾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주목받는 개념이 '사회적 처방'이다. 약물이나 치료 중심의 접근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외로움과 고립 문제를 지역사회 활동과 관계 형성을 통해 완화하려는 방식이다. 문화·예술 활동이나 공동체 프로그램처럼 일상 속 참여를 통해 정서적 회복을 돕는 접근법이다.
농업은 이러한 사회적 처방을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기르며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과정은 신체 활동과 감각 자극, 사회적 교류가 결합한 경험이다.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가 참여자에게 성취감과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정서적 안정을 이끈다. 또 자연 속 타인과 함께하는 공동 활동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연결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은 이러한 가능성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도시 거주 노인을 대상으로 보리와 유채를 활용한 자연 체험, 만들기 활동, 요리·식이, 농작업을 결합한 치유농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들은 서로 대화하고 협업하며 정서적 교감을 나눴다. 그 결과 참여 노인의 우울감은 평균 33% 감소했고, 뇌파 분석에서도 정서·인지 영역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확인됐다. 특히 흙을 만지고 작물을 가꾸는 농작업 활동에서 우울감 감소 폭이 46.6%로 더 크게 나타났다.
이러한 효과는 은퇴 노인을 대상으로 한 치유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났다. 우울 수준이 '경미한 우울'에서 '정상 수준'으로 회복됐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도 감소했다. 농업 활동이 단순한 여가를 넘어 정신건강을 지원하는 실질적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을 일회성 체험에 그치지 않고 지속가능한 서비스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노인맞춤돌봄 서비스 등 기존 복지 체계와 연계해 참여 구조를 만들고, 지역사회 기반 프로그램으로 확산할 필요가 있다. 연구기관의 과학적 검증과 지역사회의 참여가 함께 이뤄질 때 치유농업은 의료를 대체하는 수단이 아니라 의료와 복지가 놓치기 쉬운 정서적 공백을 메우는 사회적 자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초고령사회에서 건강은 단순히 수명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잘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 것인가' 이것이 본질이다.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치유농업이 노년의 시간을 '혼자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회복하는 시간'으로 바꾸는 현실적이고 따뜻한 해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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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석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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