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감독 영화 '살목지'
돌탑 등으로 신뢰 상실의 공포 구축
타인을 잠재적 가해자로 상정하는 불신 그려

영화 '살목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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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목지'는 신뢰가 거세된 시대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충남 예산의 저수지 괴담에 로드뷰라는 현대적 관찰 도구를 덧씌워,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있는지 드러낸다. 그 실체는 내 곁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다.


로드뷰 화면에 정체불명의 형체가 찍히고, 재촬영을 위해 살목지로 향하는 한수인(김혜윤) PD와 촬영팀. 폐쇄된 저수지에서 행방이 묘연했던 선배 우교식(김준한)을 만나고,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아비규환에 빠진다.

이상민 감독은 단순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서사를 거부한다. 대신 함께 고립된 동료들의 눈빛이 변해가는 과정과 눈앞의 현상이 실재인지 환각인지 확신할 수 없는 혼돈을 전면에 배치한다. 공간이 주는 물리적 압박보다 인물 간 관계가 파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냉기에 집중한다.


그런 차원에서 로드뷰는 주제 의식을 강화하는 탁월한 장치다. 세상을 평면적으로 기록할 뿐, 그 이면의 진실까진 담아내지 못해서다. 이 감독은 이를 통해 디지털 기기로 세상을 관조하는 현대인이 정작 눈앞의 실체는 파악하지 못하는 역설을 꼬집는다. 화면 너머의 정보는 맹신하면서도, 정작 곁에 있는 인간은 의심하는 현대적 병리를 살목지라는 기이한 공간에 투영한다.

영화 '살목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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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연출 방향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사건을 바라보지만, 영화 속 인물들처럼 무엇이 정보이고 기만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의 초상이 저수지의 안개 속에 갇힌 주인공들의 모습과 겹친다고 할 수 있다.


주제 의식은 상징체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특히 돌탑은 봉인과 해방, 제물과 구원이 교환되는 구조적 장치로 기능한다. 살목지 초입에 사는 할머니의 딸은 그 안에 갇혀 있다가 형태만 빌려 나온 존재다. 할머니가 이를 알면서도 딸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인간이 욕망 앞에서 얼마나 쉽게 진실을 외면하는지를 보여준다.


치밀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후반부 연출에선 아쉬움이 남는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신뢰 상실의 서사가 장르적 관습에 휩쓸려 함몰된다. 정체불명의 형체를 직접적으로 노출하고, 기괴한 시각적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전시한다. 진실을 알 수 없어 조성된 중반부까지의 공포와 정면으로 배치돼 관객이 상상력을 발휘해 채워 넣어야 할 공간이 사라진다.


영화 '살목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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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이 서로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 또한 작위적이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성이 파멸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면 각각의 전사가 탄탄해야 한다. 그러나 '살목지' 속 인물들은 공포에 반응하는 리액션 도구로 소비되는 경향이 짙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살목지에 집착해야 하는 당위성마저 부족해 불신과 갈등이 공감을 주기보다 피로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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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작품이 공포의 틀을 빌려 우리 사회에서 깨져 있는 신뢰 시스템을 정조준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 공포 영화가 흔히 빠지는 원한 맺힌 귀신의 복수극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철학적인 공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저수지라는 물리적 감옥보다 무서운 것은 타인을 잠재적 가해자로 상정하는 우리 내면의 불신이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믿음이 거세된 이 시대가 거대한 살목지일 수 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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