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공짜 데이터로 전락한 기자의 발품
뉴스를 삼킨 AI, 흩어진 한국 언론
한국판 'SPUR' 연대 구축 시급
지난 주말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인천 굴업도에 백패킹을 다녀왔다. 새벽부터 비가 오고 바람도 제법 불었지만 다행히 배가 결항하지 않았다. 굴업도에 내려 13kg짜리 배낭을 메고 산길을 약 1시간 걸어 박지에 도착했다. 짐을 꾸리기 전엔 예상치 못했던 급경사 언덕과 거친 돌길, 비바람에 힘이 부쳤지만 텐트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한 캔. 호텔을 포기하고 기꺼이 백패킹을 택하는 이유다.
기자의 취재 현장도 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고단한 산행과 크게 닮아 있다. 취재는 태생적으로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취재원에게 거는 수십 통의 전화는 차가운 거절과 함께 끊어지기 일쑤다. 천신만고 끝에 확보한 자료도 이미 다른 누군가가 썼다면 뉴스 가치를 잃는다. 취재를 통해 확보한 정보의 파편들을 의심하고, 깎아내고, 교차 검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겨우 팩트 한조각이 완성된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뉴스는 그저 매끄러운 텍스트의 나열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싸워 얻어낸 값진 전리품이다.
하지만 이 소중한 자산들이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의 인공지능(AI)에 의해 너무나도 손쉽게 도둑맞고 있다. AI는 언론사들이 배낭의 무게를 견디며 찍어온 정상의 풍경 사진만 쏙 빼가면서, 그 이면에 존재하는 끈질긴 추적의 등산로는 철저히 지워버린다. 언론사가 피땀 흘려 축적해온 수십 년 치 뉴스 콘텐츠를 'AI 고도화'라는 명분으로 공짜 데이터 취급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언론사 2000여곳이 소속된 뉴스미디어연합(News Media Alliance·NMA)이 2023년 발행한 백서를 보면 챗GPT와 같은 거대언어모델(LLM)은 뉴스 콘텐츠를 일반 웹 콘텐츠와 비교해 5배에서 최대 100배까지 더 큰 비중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다수의 언론사가 크롤러 차단에 나서고 있지만 이를 우회하는 방식으로 AI의 무단 학습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뉴스를 공짜로 섭취하고 똑똑해진 AI가 내놓는 답변엔 땀 냄새도, 한 치의 주저함도 없다. 기자가 쓴 기사엔 종종 '정황상 그렇게 추정된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문법들은 가끔 기자의 '뇌피셜(근거 없는 생각)'로 오해받지만 가까스로 모은 정보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한 합리적 추론임을 독자에게 알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AI가 내놓는 답변에서는 이처럼 '불완전하지만 최선을 다해 진실을 전하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없다. 바이라인(기자명)마저 지워진 그곳에선 치명적인 오답조차 '환각 현상'이라는 기술용어 뒤에 숨긴다.
글로벌 언론사들은 AI의 무분별한 뉴스 콘텐츠 탈취를 막기 위해 공동 대응에 나서고 있다. 2023년 뉴욕타임스가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고 2024년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욕포스트는 퍼플렉시티를 고소했다. 지난 2월 영국에서는 BBC, 파이낸셜 타임스, 가디언, 데일리 텔레그래프, 스카이 뉴스 등이 'SPUR'(Standards for Publisher Usage Rights·언론사 사용 권리 기준)라는 공동 연합체를 구성했다. 진보 성향의 가디언과 보수 성향의 텔레그래프처럼 정치적 지향점이나 타깃 독자층이 정반대인 라이벌 매체들까지 하나로 뜻을 모았다. 언론사 생존을 넘어 저널리즘의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은 것이다.
이런 흐름과 달리 우리나라 언론사들의 움직임은 미온적이고 파편화돼 있다.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 3사가 지난해 1월 네이버에, 올해 2월엔 오픈AI에 저작권 소송을 낸 게 전부다. 이 와중에 일부 방송사는 네이버와 AI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등 각자도생의 길로 흩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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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글로벌 AI 기업들은 언론사들을 냄비 속에 넣고 서서히 물을 끓이고 있다. 국내 언론사들은 데이터 무단 학습과 트래픽 탈취 행위를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이에 대응할 힘마저 잃어버린 것 같다. 우리 언론도 합심해 글로벌 AI 기업과 맞서야 하지만 이보다는 5월부터 본격 가동하는 거대 포털의 평가체계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포털이 던져주는 트래픽과 전재료에 종속된 결과다. 물의 온도가 끓는점에 이르면 저널리즘은 결국 누구의 이름도 새겨지지 않은 데이터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때는 백패킹의 낭만과 같은 기자정신도 끓어 증발한 냄비 속 물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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