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차관 가자, 한투스퀘어로 와"…자본과 지성의 '동거'
SKY 교정 둘러보니 기업명 담긴 건물 가득
낙후된 환경 대신 호텔 라운지급 설비 갖춰
기업은 홍보…학생은 "학습권 보장 자부심"
지난 6일 정오께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정문 셔틀버스 정류장. 개강을 맞은 학생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캠퍼스 깊숙이 들어가자 익숙한 대기업 로고들이 잇따라 시야에 들어왔다. 삼성, SK, LG, 현대차…. 대한민국의 지성을 상징하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캠퍼스는 이제 기업들의 기부금이 빚어낸 거대한 현대식 인프라 전시장과 다름없었다.
과거 '지성의 상징이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한다'는 엄격한 비판도 있었으나, 오늘날 학생들은 기업의 이름이 붙은 건물을 애칭으로 부르며 그 안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서울대 대운동장 인근에선 목조·유리·콘크리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IBK커뮤니케이션센터가 세련된 풍광을 뽐냈다. 2014년 완공된 이 건물 외부에는 "서울대 학생 및 교직원이 연구와 언론인 양성에 전념해 대한민국 언론과 미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IBK기업은행에서 이 건물을 기증한다'는 팻말이 서 있었다. 언론정보학과 재학생 박모씨(25)는 "과거 선배들은 낡은 사회과학대학 건물을 여러 학과가 공유해 과방조차 협소했다고 들었다"라며 "전용 스튜디오도 생기는 등 기업 후원이 우리 학과의 가능성을 인정해준 것 같아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경영대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SK그룹과 LG그룹의 대결이 펼쳐진다. 1990년 10월 준공돼 기업 기부 건물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SK경영관은 붉은 벽돌 외관이 위용을 자랑하며, 내부 로비는 과잠(대학점퍼)을 입은 학생들로 붐볐다. 맞은편에는 1998년 LG연암문화재단이 공사비 88억원을 전액 부담해 준공한 LG경영관이 마주 서 있다. 두 건물 사이에는 2020년 확장 증축된 매니지먼트센터(59-1동)가 연결통로로 이어져 있는데, 2층 네트워크 라운지는 통유리창 너머로 경영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습 명당'으로 꼽힌다. 캠퍼스 외곽 연구공원에는 삼성전자 서울대연구소와 SK텔레콤 연구동, LG연구동이 포진해 서울대의 학문적 위상을 뒷받침했다.
고려대 안암캠퍼스에선 기업들이 기부한 건물이 단과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수준을 넘어 학생들의 생활 속에 애칭으로 깊숙이 자리잡은 모습이었다. 경영학과 학생들은 현대자동차경영관(현차관)과 LG-POSCO경영관(L포관)을 번갈아 오가며 수업을 듣는다.
현차관은 현대차그룹 등 3600여명의 기부로 지어졌다. 지열 냉난방시스템 덕분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신기한 공간'으로 통한다.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 이연호씨(24)는 "시험 기간 소파에서 쪽잠을 청하면 아주 쾌적하게 잠들 수 있었다"며 활짝 웃었다.
지난 6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내 현대자동차경영관 전경. 이 건물은 현대자동차그룹의 기부로 건립됐으며 지열 냉난방 시스템을 갖춘 쾌적한 환경 덕분에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학습 공간으로 꼽힌다. 박호수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호텔신라가 인테리어를 맡아 대리석 로비가 돋보이는 L포관의 라운지 역시 학생들의 단골 학습 공간이다. 캠퍼스 중앙의 동원 글로벌 리더십 홀은 학생들 사이에서 '동글리'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지난해 리모델링한 학생회관 1층은 한투(한국투자금융지주) 스퀘어라는 간판을 달고 오피스텔 같은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자연계 캠퍼스의 상징인 하나스퀘어는 애초 지하 4층으로 계획됐지만, 단단한 화강암 지반 탓에 지하 3층으로 마무리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자연계 캠퍼스에 위치한 아산이학관에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고려대의 특별한 인연이 담겨 있다. 정 명예회장은 1935년 고려대 본관 건립 당시 현장에서 막노동 인부로 일했다. 수십년 뒤 고려대가 이학관 건립 재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정 회장은 현대그룹을 통해 180억원을 지원했다. 1996년 완공된 이 건물은 그의 호를 따 '아산(峨山)' 이학관으로 명명됐다. 1층 로비 대리석 벽면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이 밖에도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의 아호를 딴 우정간호학관과 우정정보관은 각각 부영그룹으로부터 100억원 이상을 지원받아 건립됐다. CJ그룹이 70억원을 출연해 2007년 완공한 CJ식품안전관은 글로벌 수준의 식품 안전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전문 연구기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연세대 신촌캠퍼스에도 주요 그룹들의 흔적이 집약돼 있다. 중앙도서관과 연결된 연세 삼성학술정보관은 '신중도(신중앙도서관)'로 불린다. 2000년대 초반 기존 도서관 수요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삼성의 기부로 조성된 이곳은 종이 자료에서 전자 정보로 넘어가는 디지털 기반 학습 환경을 선제적으로 도입했다. 재학생 구모씨(25)는 "좌석도 넉넉하고 쾌적해 자부심을 느낀다"며 "취업을 고민하는 입장에선 학교와 기업이 가깝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2000년 중앙도서관 뒤편으로 연결되도록 지어진 연세 삼성학술정보관(사진)은 학생들 사이에서 '신중도(신중앙도서관)'로 불린다. 전자자료 접근이 용이하도록 2층에 대규모 컴퓨터 좌석을 갖추고 있고 3층 미디어 커먼스에서 영상 제작 및 감상이 가능한 멀티미디어 컴퓨터를 제공한다. 오지은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LG그룹이 기부한 세브란스병원 동편 상남경영관은 지상 6층 건물에 호텔식 객실 36개를 갖춰 외부 경영인들이 교육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1996년 6월 당시 상경대 동문회장이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동문의 기부로 세워진 대우관은 연세대의 상징인 언더우드관 뒤편에서 고성 같은 위용을 자랑한다. 본관과 별관을 합치면 연면적만 1만평이 넘는다. 대운동장 서쪽 GS칼텍스 산학협력관에는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등 첨단 연구시설이 갖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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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대학들이 기업 기부 유치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하다. 등록금 동결과 예산 한계 속에서 낙후된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 학생들에게 최상의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 대학 관계자는 "기업 기부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학생들에게 최첨단 연구 환경과 복지를 제공하는 실질적인 교육권 보장의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박재현 기자 now@asiae.co.kr
오지은 기자 j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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