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대통령을 굴복시킨 '실버 민주주의'
이재명 대통령이 제안한 '출퇴근 시간 노인 무임승차 제한'이 끝내 무산됐다. 정책의 실효성을 떠나 제대로 된 검토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 정책 조정에 관한 책임을 담당하겠다고 나선 부처도 없었다. 대통령이 시킨 일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던 정부 부처는 서로 일을 떠넘긴 셈이다. 쾌도난마(快刀亂麻) 하던 이 대통령도 조용히 자신의 말을 거둬들였다.
무임승차 대상인 만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지난해 1000만명을 돌파했다. 70대 인구(654만명)는 20대 인구(630만명)를 넘어섰다. 인구수만 살펴본다면 정치권에서 젊은 세대 못지않게 노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야시로 나오히로 일본 쇼와여대 특임교수는 이런 현상을 '실버 민주주의'라 불렀다. 고령화한 사회일수록 노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커진다고 한다. 노인 눈치를 보며 개혁을 미루는 경우도 있다. 재정 지출은 전체보다 노인에게 유리하게 편성될 때가 있다. 실버 민주주의는 성장에 치명적이라는 우려도 있다. 전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회고록에서 실버 민주주의가 잠재성장률에 얼마나 위험한지 간과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본과 유사한 인구 구조를 가진 한국도 실버 민주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임수송이 늘면서 서울교통공사 누적 적자는 20조원에 육박한 상태다. 언젠가 미래 세대가 갚아야 할 돈이다. 이번 대통령의 지시는 문제를 풀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청와대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못 박는 바람에 논의가 진전되기 어려웠다. 이런 식이라면 복지, 노동, 정년 등 다른 개혁에서도 실버 민주주의가 횡행할 우려가 크다.
불행하게도 우려는 이미 현실이 돼 가고 있다. 직전 연금개혁 당시 정부는 청년 부담을 덜기 위해 세대별로 보험료율을 차등 인상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국회는 이를 무시하고 모든 세대의 보험료율을 조금씩 올리기로 결정했다. 빚 부담을 줄이는 자동조정장치도 없앴다. 한국재정학회에 따르면 이 개혁으로 2000년대생의 1인당 순혜택이 22% 급락하지만, 1960년대생은 소폭(0.4%)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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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려운 노인을 위한 복지는 필요하다. 다만 노인이라고 해서 '가죽을 벗기는' 개혁의 고통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출퇴근 혼잡 완화를 위해 무임승차를 일정 시간 제한하도록 "연구해보라"는 원론적인 말도 못 꺼내는 사회에서 개혁의 미래가 존재할 수 있을까. '구조개혁의 원년'은 거저 찾아오지 않는다. 실버 민주주의에 굴복하지 말고 개혁에 나서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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