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배우를 만들어내는 시대, 법은 어디에
염혜란 무단 복제 사건이 드러낸 제도의 민낯

AI 영화 '검침원'의 한 장면.

AI 영화 '검침원'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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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에 인공지능(AI)으로 제작된 단편영화 한 편이 공개됐다. 제목은 '검침원.' 주인공은 배우 염혜란을 빼닮았다. 얼굴은 물론 목소리, 말투, 체형까지 정교하게 재현됐다. 제작진은 배우에게 허락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염혜란 측은 "어떤 협의도 없었다"며 삭제를 요구했다. 영상은 당일 비공개로 전환됐다.


단순한 연예계 이슈로 넘기기 어려운 사건이다. 기술이 앞서간 자리에서 제도의 공백이 그대로 노출됐다. 초상권 침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작진은 정교한 재현을 넘어 사전에 허락받았다는 허위 사실까지 내세웠다. 무단 복제에 거짓 동의까지 얹힌 셈이다. 기존 딥페이크 논란과 맥은 같지만, 한 겹 더 깊숙이 들어온 양상이다.

문제의 본질은 실제 출연처럼 오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술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리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렇게 촉발된 혼동은 단순한 권리 침해를 넘어 시장 질서까지 교란한다. 배우의 실제 출연 여부가 불분명해지는 순간, 노동과 계약이라는 전통적 구조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를 규율할 제도적 장치는 충분치 않다. 한국은 초상권과 퍼블리시티권을 통해 개인의 이미지를 일정 부분 보호해 왔지만, 이는 판례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크다. 얼굴과 음성은 물론 표정과 행동까지 재현하는 최근의 생성형 AI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현행 법체계로는 새로운 유형의 침해를 규율하기 어렵다. 특히 재현된 인격이 상업적으로 유통될 경우, 이를 어떤 권리 침해로 볼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부족하다.

해외에서는 이미 유사한 문제에 대한 대응을 구체화했다.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은 2023년 118일간의 파업 끝에 스튜디오 측과 AI 디지털 복제에 대한 사전 동의와 보상 원칙을 단체협약에 명문화하는 합의를 이뤄냈다. 그해 12월 조합원 78%의 찬성으로 비준됐다.


입법 차원에서도 움직임이 이어졌다. 미국 테네시주는 2024년 초상·음성·이미지 보안법(ELVIS Act)을 통해 음성을 포함한 정체성 요소의 무단 복제를 주법 차원에서 규율했다. 같은 해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디지털 복제 및 AI 투명성과 관련한 법안들에 서명했다. 유럽연합(EU)도 2024년 8월 AI 규제법(AI Act)이 발효됐다. 생성형 콘텐츠에 대한 투명성 의무가 올해 8월부터 본격 적용된다. 일련의 흐름은 기술을 무조건 허용하는 방식에서 조건부 허용으로 규제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과 달리 기존 권리를 단순히 확장 해석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제는 고쳐 쓸 게 아니라 새로 써야 할 시간이다. 우선 '디지털 초상권'과 같은 개념을 도입해 AI를 통해 재현된 얼굴, 음성, 행동 등을 포괄하는 권리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실존 인물로 착각할 수 있는 경우, 상업적 활용 여부와 관계없이 사전 동의 절차를 요구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나아가 플랫폼 사업자에도 최소한의 검증 책임을 부과해 유통 단계의 통제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러한 규제는 표현의 자유와 충돌할 여지가 있는 만큼, 적용 범위와 기준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논의가 병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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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다. 우리는 오랫동안 얼굴을 개인의 일부로만 여겨왔다. AI 시대에 그것은 더 이상 신체에만 속하지 않는다. 데이터로 복제되고, 변형되며, 유통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얼굴을 당사자로 인식한다. 이 간극이 바로 문제의 출발점이다. 얼굴이 데이터로 소비되는 순간에도, 그 책임과 영향은 여전히 인간에게 귀속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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