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가 없다" 먹어보고 바로 투자 결정…주방 로봇에 돈 몰리는 이유[흑백요리봇]②
"맛있으니까 투자한다"…조리 로봇에 흘러간 자본
경쟁 부재·표준화·글로벌 확장성…VC가 본 '주방 자동화'
주방 로봇 기업 투자 배경을 묻자 벤처캐피털(VC) 심사역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답이다. 일차적으로 밝힌 이유는 '맛'이지만, 실제로는 더 복합적인 판단이 깔려 있다.
치킨과 햄버거, 삼겹살, 튀김까지 각 로봇이 만드는 음식은 제각각이지만, VC들의 판단 기준은 단순하다. 경쟁자가 없거나, 아직 시장이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팀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경쟁자가 없다"…VC가 꽂힌 차별화 포인트
조성근 캡스톤파트너스 책임심사역은 햄버거 패티 굽기용 로봇 '알파그릴'을 생산하는 에니아이 투자 이유에 대해 "패티 전용 로봇은 정말 경쟁자가 없다. 같은 솔루션을 가진 곳이 없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매력"이라고 말했다.
에니아이는 앞서 캡스톤파트너스, 인터베스트, SV인베스트먼트,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등 국내외 VC로부터 투자를 유치한 바 있다. 직전 프리시리즈A 브리지 단계에선 한국산업은행이 58억원을 추가하며 현재까지 누적 투자액은 255억원으로 불어났다.
조 심사역은 맛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으로 구현한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미국 미소로보틱스(Miso Robotics)의 '플리피(Flippy)'는 로봇팔로 패티를 뒤집는 방식인데, 그릴 뒤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도입 비용도 1억원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에니아이는 아예 뒤집지 않는 길을 택했다. '왜 뒤집어야 하지? 양면으로 구우면 되잖아'라는 답을 낸 것"이라며 "정해진 공간에 패티를 두면서 뜨는 동작도 훨씬 단순해졌다"고 설명했다.
"3년을 지켜보고, 먹어보고 투자했다"
LB인베스트먼트가 고기 굽기 로봇 '그릴X'를 생산하는 비욘드허니컴과 처음 접촉한 건 2019년이다. 최재훈 LB인베스트먼트 수석심사역은 "초기 투자 유치 단계에서 진행된 시연회를 통해 로봇이 구워준 고기를 먹어봤다. 셰프가 굽는 수준의 스테이크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후 3년간 기술 발전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투자를 검토하면서 유사한 솔루션이 있는지 국내뿐 아니라 미국까지 조사했지만 찾아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주목한 핵심 기술은 두 가지다. 수천만 원대 중적외선 카메라를 수십만 원 수준으로 낮춘 저가 분광 센서,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고기 표면의 분자 상태 변화를 학습한 인공지능(AI) 모델이다. 최 심사역은 "새로운 경쟁자가 따라가기 어려운 독보적인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비욘드허니컴은 이후 LB인베스트먼트가 이끈 시리즈A 브리지에서 100억원을 유치했다. 산업은행, BNK벤처투자, 데브시스터즈벤처스 등이 참여했고, 네이버 D2SF가 초기 투자를 맡았다. 누적 투자액은 196억원이다.
실제 현장 반응도 긍정적이다. 최 심사역은 "제품을 계속 유지하고 활용하는 매장을 보면, 인건비 절감보다 '맛' 때문에 쓰는 경우가 많다"며 "오랜 기간 고깃집을 운영한 사장님들이 로봇이 구운 맛을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극한 환경이 만든 장벽…대기업도 쉽게 못 들어온다
주방 로봇은 기술 난도가 높은 영역이다. 음식점은 무균 시스템을 갖춘 제조 공장과 달리 훨씬 가혹한 환경에 놓여 있다. 한여름에는 40~50도까지 올라가는 고온 속에서 기름과 열기, 습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채 수백만 번의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각종 충격과 오염까지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 내구성 확보가 핵심 과제로 꼽힌다.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식당 영업이 즉시 중단되는 만큼, 이를 뒷받침할 신속한 AS 체계 역시 필수다.
조 심사역은 "김밥 자르는 기계, 포장 기계처럼 단순하지만 각 현장에서 꼭 필요한 장비들이 있다. 사장님들이 꼭 필요로 하는 문제에 로봇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심사역은 "조리 로봇은 도입이 어렵지만, 한 번 들어가면 빠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내 고깃집 10만개"…해외무대까지 겨냥
전체 시장 크기 역시 VC들의 투자 판단 배경이다. 국내에서 돼지고기 또는 소고기를 파는 음식점 수만 10만개를 넘는다. 국내 시장은 수많은 소상공인이 나눠 가진 구조라 초기 고객은 자연스럽게 대형 프랜차이즈나 고매출 매장으로 제한되지만 1000개 매장만 조리 로봇을 도입한다고 해도 수백억 원 규모의 시장이 잡힌다.
나아가 VC들은 더 큰 해외시장도 노리고 있다. 에니아이 역시 미국 시장 진출을 진행 중이다. 현재 미국 동북부 스포츠바 체인 등에 장비를 설치했으며, 대형 프랜차이즈 납품을 계획 중이다. 비욘드허니컴도 이미 해외에서 도입 문의를 받고 있다. 최 심사역은 "미국에서는 타사의 조리 로봇 장비가 월 2500달러(약 370만원) 수준에 렌털되고 있다"며 "월 100만원 수준의 국내 임대료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공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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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좁고 까다로운 주방에서 검증된 제품이라면, 미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더 넓은 시장에서도 통할 것이란 계산도 깔려 있다. 한국은 외식 프랜차이즈 밀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인건비 상승과 인력난이 동시에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장'에서 먼저 살아남은 제품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다는 것이 VC들의 베팅 근거다.
조 심사역은 "미국 시장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점에 햄버거 메뉴가 있다"며 "한국에서 웬만한 식당에 돈가스와 볶음밥이 있는 것처럼, 패티 굽는 기계도 튀김기 수준의 시장이 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황서율 기자 chest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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