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사칭부터 대전 안전공업 화재까지 악용
경찰에선 담당자 휴가 이유로 초동 대처 미뤄
"구조적 개선 없으면 유사 피해 계속 늘어난다"

스마트축산 장비 회사의 대표 A씨는 일주일 전 수상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천안시청 공무원이라고 소개한 목소리는 "대전 화재 탓에 감사 대비용 물품이 필요하다"고 했다. 납품 계약을 체결할 테니 특정 업체에서 대리구매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공무원을 믿고 두 차례에 걸쳐 8100만원을 송금했다. 계속되는 추가 구매 요구에 천안시청으로 전화하니 그런 공무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A씨는 곧장 경기 수원팔달경찰서를 찾았다. 그 사이 공무원 사칭자가 지목한 업체는 폐업 신고까지 마쳤다. 물론 A씨와 체결하겠다던 계약도 허위였다. 이런 사정을 설명했지만, 경찰은 녹음파일 오류와 담당 수사관 휴가를 이유로 사흘 뒤 재방문을 요구했다. 은행에선 경찰의 공문이 없다는 이유로 계좌 지급정지 요청을 거부했다. 경찰이 초동 대처를 뭉갠 사이 골든타임은 지나갔다.

대전 화재까지 악용…법 사각지대 노린 '노쇼 사기' 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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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재난까지 악용하는 신종 피싱(사기)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량 주문을 미끼로 특정 업체에 선(先) 결제를 유도한 뒤 잠적하는 등 범죄 수법이 한층 교묘해지고 있지만, 피해 확산을 방지할 행정·수사 체계는 여전히 사후 대응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노쇼(대리구매) 사기는 6515건 발생했다. 피해액은 1256억7000만원에 달한다. 노쇼 사기는 통상 대리구매를 요구한 뒤 돈을 가로채 잠적하는 신종 범죄다. 초기에는 식당을 상대로 대규모 예약을 하거나 고가의 주류 등을 대신 주문해달라고 요구하는 수법이었는데, 최근에는 공무원·연예인 사칭에 더해 재난 등 국가적 사건까지 악용하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1월 687건(225억원), 2월 332건(109억원), 3월 521건(170억원) 발생했다. 지난해 월평균 542건·105억원 상당의 피해가 발생한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피해 규모가 늘어난 셈이다.


법 체계의 한계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현행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르면 금융회사는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즉시 지급정지와 피해금 환급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투자리딩방, 로맨스스캠(연애빙자사기), 노쇼 사기 등 신종 범죄에서 나타나는 '재화·용역 거래'를 가장한 수법은 금융사의 지급정지 대상인 보이스피싱 범죄 분류에서 벗어나 있다.


이 같은 신종 피싱은 피해자가 사기 피해를 인지해도 은행을 통해 즉시 계좌를 동결하거나 환급 절차를 밟을 수 없다. 경찰관서 판단을 거쳐야만 정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만큼 경찰의 신속한 대응이 중요해졌지만 A씨가 겪은 사례처럼 초동 대처가 늦어지는 일도 많다.


대전 화재까지 악용…법 사각지대 노린 '노쇼 사기' 활개 원본보기 아이콘

유사 피해를 막으려면 체계 전반의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신고 즉시 계좌를 임시 동결해 1차적으로 자금 유출을 차단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공공기관 사칭 범죄를 차단하기 위해 발주·구매 요청 시 담당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인증체계도 필요성이 거론된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피싱 범죄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지만, 피해를 차단할 법과 수사 체계는 여전히 뒤처지고 있다"며 "보완 입법을 통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신고 즉시 계좌를 임시 동결할 수 있는 선 지급정지 제도 등을 시급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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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부는 경찰청·금융권 협의를 통해 오는 5월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방지 및 피해구제 표준 업무방법서'를 개정할 계획이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적용 가능성이 일정 수준 이상 인정될 경우 경찰 확인을 전제로 즉시 계좌 지급정지와 자금 환수가 이뤄지도록 하는 방안이다.


박재현 기자 no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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