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사이드 갤러리 한만영 개인전 'Time Stitching: 시간의 무늬'
과거를 복원하지 않고 오늘 옆에 다시 눕혀 놓는 회화

옅은 분홍과 마른 하늘빛, 한 번 빛이 빠져나간 듯한 회색. 화면은 크지만 목소리는 높지 않다. 대신 오래 본 것들이 늦게 떠오른다. 안견의 산수 같다가, 브뢰헐의 군중 같다가, 어느 순간 미키마우스 얼굴 하나가 불쑥 걸린다.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한만영 개인전 'Time Stitching: 시간의 무늬'는 과거의 이미지를 다시 거는 전시가 아니다. 오래된 그림을 오늘 옆에 다시 눕혀 놓는 전시다.

Reproduction of time -Dreaming Acrylic on Canvas & Object 193.9x130.3cm 2026. 아트사이드 갤러리

Reproduction of time -Dreaming Acrylic on Canvas & Object 193.9x130.3cm 2026. 아트사이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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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영의 화면에서 먼저 무너지는 것은 원본의 권위다. 고전은 정면에 서지 못한다. 한발 물러나 배경처럼 번지고, 그 앞에 색연필 하나, 군번줄 하나, 책 한 권, 작은 부품 같은 사물이 나온다. 명화가 중심인 줄 알았는데, 끝내 눈에 남는 것은 그 사소한 물건들이다. 과거는 흐려지고 현재는 물건의 얼굴로 남는다. 작가가 1980년대부터 이어온 '시간의 복제' 연작이 지금도 낡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시간을 복원하지 않는다. 일부러 어긋나게 꿰맨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도 그렇다. 'Reproduction of time - An Kyon 2'에서는 안견의 산수가 거의 증발하듯 남아 있고, 화면 아래 붙은 오브제가 그 유령 같은 풍경을 다시 현실 쪽으로 끌어당긴다. 'Chaekgeori'는 조선의 정물을 다시 그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책은 지식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복제 가능한 물건이 되고, 그림 위에 덧입혀진 시간은 반듯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한 번 접혔다 편 흔적처럼 남는다. 'Reproduction of time 2407'에서는 익숙한 대중 아이콘이 화면에 들어오며 공기가 조금 비틀린다. 가벼운 얼굴인데, 그 아래 붙은 물성은 웃음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다.

Reproduction of time- 2404  Acrylic on Canvas  116.8x91cm 2024. 아트사이드 갤러리

Reproduction of time- 2404 Acrylic on Canvas 116.8x91cm 2024. 아트사이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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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차용을 이론으로 밀지 않는 데 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화면은 이미 알고 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이미지가 한 자리에 겹쳐 있고, 동양화와 서양화, 순수미술과 대중문화, 기억과 기호가 굳이 화해하지 않은 채 붙어 있다. 매끈하게 봉합되지 않은 그 틈이 오히려 그림의 호흡이 된다. 작가는 단색화의 엄격한 평면이나 민중미술의 서사적 압력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들어가지 않았고, 그 비켜 선 자리에서 오래 자기 문법을 밀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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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전시는 대개 많이 보여주기보다, 보는 방식 하나를 바꿔 놓는다. 'Time Stitching: 시간의 무늬'도 그렇다. 이 전시는 명화를 다시 보게 하기보다 이미지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다시 보게 한다. 무엇은 흐려지고, 무엇은 끝내 남는가. 큰 역사보다 작은 오브제가 더 오래 현재를 증언하는 순간이 있다. 한만영의 화면은 그 순간을 붙잡는다. 그림은 조용하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얕지 않다. 보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무엇이 덜 봉합된 채 남아 있었는지 천천히 떠오른다. 전시는 4월 25일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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