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루·구이산·구궁산·셴닝온천·무우공사
후베이 남부가 보여준 '의외의 중국'
우한은 오랫동안 사건의 도시로 기억돼 왔다. 많은 한국인에게도 이 이름은 여행지의 호기심보다 팬데믹의 불안을 먼저 환기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도시를 찾는 일은 낯선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여행이라기보다, 굳게 굳어버린 한 이미지의 표면을 더듬는 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막상 현지에 서면 그 기억은 생각보다 빠르게 힘을 잃는다. 장강은 예상보다 훨씬 넓고, 황학루 아래에는 밤까지 사람의 기척이 모이며, 강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산은 우한이 이미 오래된 기억에만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한을 다시 본다는 것은 결국 한 도시의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통과한 뒤 새로 짜이고 있는 현재를 읽는 일에 가깝다.
요즘 한국의 젊은 여행자들이 중국에서 먼저 떠올리는 도시는 대개 상하이와 충칭이다. 상하이는 왕홍 체험과 카페, 맛집과 근대 건축, 짧은 비행시간과 편한 소비 동선이 촘촘하게 맞물리는 도시다. 충칭은 또 다르다. 홍야동의 야경, 층층이 겹친 산성 지형, 강을 가르는 케이블카와 경전철이 도시 자체를 거대한 콘텐츠처럼 보이게 만든다. 상하이가 세련되고 소비하기 쉬운 도시라면, 충칭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쇼처럼 작동하는 곳이다. 후베이 남부는 그 둘과 결이 다르다. 이곳은 한 장면의 화려함보다, 도시와 산, 온천과 농촌이 한 줄의 여정 안에서 차례로 몸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억된다.
황학루는 우한시 장강 강변에 있는 유명한 역사적 누각으로 악양루(岳陽樓), 등왕각(王閣)과 함께 중국 '강남 삼대명원'의 하나로 손꼽힌다. 각 층마다 보이는 풍광이 다르며, 황학루 꼭대기에서는 양쯔강을 가장 잘 조명할 수 있다. 사진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사건의 도시를 다시 읽는 법
그 출발점은 황학루다. 관광객에게 황학루는 대개 고전 시문 속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 지금 그곳은 그저 한 번 올려다보고 내려오는 명소에 머물지 않는다. 누각 아래엔 사람들이 몰리고, 고전 복식 차림을 한 직원들이 동선을 안내하고, 오래된 서사는 사진과 체험, 밤의 조명과 함께 오늘의 관광 문법으로 다시 번역된다. 천년의 이름은 그대로인데, 그 이름을 소비하는 방식은 분명히 달라졌다. 황학루의 진짜 인상은 누각 자체만이 아니라 그 앞에 모이는 사람들의 속도에 있다. 오래된 건축은 가만히 서 있지만, 그 아래의 시간은 전혀 정지돼 있지 않다. 우한이 이미 회복을 넘어 재해석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사실은 바로 그 장면에서 먼저 읽힌다.
장강을 건너 구이산으로 가면 그 감각은 한층 또렷해진다. 구이산은 단순히 전망 좋은 산이나 역사 유적의 배경으로 설명하기엔 지금의 표정이 훨씬 복합적이다. 이곳에선 오래된 삼국 서사가 박제된 설명문으로 남아 있지 않고, 식사와 공연, 체험의 형식으로 다시 움직인다. 고전의상을 입고 장터를 돌고, 이야기를 따라가며 음식을 맛보는 프로그램은 한국 관광객에게도 어렵지 않게 번역될 수 있다. 역사 공부를 요구하는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공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우한이 지금 보여주는 변화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과거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지금의 감각으로 다시 옮겨 놓는 일. 그래서 우한은 더 이상 팬데믹의 기억만으로 묶어둘 수 없는 도시처럼 보인다.
강의 도시를 지나 산의 도시로
하지만 후베이 남부의 진짜 반전은 우한을 지난 뒤 시작된다. 남쪽으로 길을 잇자 풍경의 문법이 달라진다. 강이 이끌던 도시의 리듬은 점차 산의 호흡으로 넘어가고, 빌딩의 수직선은 능선의 곡선으로 바뀐다. 그렇게 도착하는 곳이 셴닝이다. 현지에선 온천의 도시, 계화의 도시라 부르는 곳. 이름만 들으면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이 먼저 다가오지만, 실제 여행의 밀도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향기와 온천의 이미지 뒤편에 구궁산이라는 단단한 산악권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구궁산은 좋은 산이 가진 조건을 거의 다 갖추고 있다. 높은 해발과 짙은 숲, 여름에도 서늘한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을 들일수록 천천히 안쪽을 내보이는 성격이 그렇다. 산길을 몇 번이고 굽이돌아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운중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높은 곳에 놓인 호수인데도 이상하게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물가로 가까이 걸어 들어가게 하고, 둘레를 따라 더 머물게 한다. 천산천지나 백두산 천지처럼 멀리서 우러러보는 절경과는 결이 다르다. 이곳은 전망보다 체류의 감각이 먼저 오는 호수다. 그래서 더 묘하다. 한 번 보고 지나치는 대신 하룻밤쯤 묵으며 저녁과 새벽을 함께 보고 싶어진다.
우한 구이산 지음전의 몰입형 식사 공연 '삼국군방연' 중. 삼국지 이야기와 형초 음식, 전통의상 체험, 야경 관람을 한데 묶어 체류형 야간 관광 콘텐츠로 현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영상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머무는 호수, 깨어나는 능선
운중호 곁에서 밤을 보내면 구궁산이 왜 '머무는 산'인지 알게 된다. 낮에는 호숫가가 고요하고, 해가 지면 광장과 산책로에 사람의 온기가 붙는다. 산 위의 호수인데도 어딘가 작은 계절 마을처럼 느껴진다. 이 체류감은 다음 장면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새벽이면 동고포로 오른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 전 능선 위에 서 있으면 먼저 바람이 오고, 그다음 아래에서 운해가 밀려온다. 위로는 풍차가 느리게 돈다. 사진으로는 익숙할지 몰라도, 실제로 강한 것은 그 순간의 공기다. 조금 차갑고, 조금 비어 있고, 그래서 사람을 오래 서 있게 만드는 공기. 동고포의 새벽은 '좋은 풍경을 봤다'보다 '잠시 다른 시간대에 서 있었다'는 느낌을 아로새긴다.
낮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석룡협으로 내려간다. 운중호가 구궁산의 바깥 표정이라면, 석룡협은 그 안쪽 얼굴이다. 길은 좁아지고, 물소리는 가까워지고, 바위와 나무, 계단과 폭포가 촘촘히 겹친다. 이곳의 미덕은 압도적인 한 장면보다 계속 바뀌는 밀도에 있다. 조금 전까지 호수 곁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계곡 바닥의 습기를 맡고 있다. 같은 산인데 풍경의 성질이 전혀 다르다. 구궁산은 그래서 한 번에 소비되지 않는다. 호수와 능선, 협곡이 차례로 얼굴을 바꾸며 사람을 붙든다.
온천에서 밭까지, 여행의 마지막 결
산에서 내려와 셴닝온천에 몸을 담그는 순간 이 여정은 또 한 번 다른 결로 넘어간다. 하루 종일 산의 찬 공기를 마신 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는 경험은 단순한 휴식 이상의 감각을 남긴다. 우한이 시선의 도시라면, 셴닝은 몸의 도시다. 상하이나 충칭이 사진과 맛, 소비의 리듬으로 먼저 기억된다면, 셴닝은 마지막에 몸 전체를 천천히 이완시키는 방식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코스의 마지막에 무우공사가 있다는 점은 꽤 인상적이다. 절경과 온천을 본 뒤 밭으로 가는 여행은 흔치 않다. 그런데 여기선 그게 자연스럽다. 무를 중심으로 한 농촌 체험과 식사, 숙박과 가공의 동선은 관광이 단지 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지역의 생활과 소득 구조까지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무(卜/Radish)를 테마로 운영하는 무우공사 전경. 농업·문화·관광을 결합한 복합형 농촌관광 단지로, 이 곳만의 자연 친화적인 체험과 풍경을 선사한다. 사진 김희윤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후베이 남부는 상하이나 충칭의 대체재가 아니다. 그 다음 장에 놓일 수 있는 중국이다. 우한에서 오래된 도시가 자기 이미지를 다시 쓰는 장면을 보고, 구이산에서 역사가 체험으로 번역되는 순간을 지나, 구궁산에서 호수와 새벽과 협곡을 통과한 뒤, 온천에 몸을 담그고, 마지막엔 무밭과 식탁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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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은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핫플 투어와는 다르다. 대신 더 천천히 스며들고, 더 오래 남는다. 우한을 코로나의 도시로만 기억하는 시선은 너무 평평하다. 그 도시를 지나 남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후베이는 비로소 제 본래의 높이와 깊이를 드러낸다. 한 장의 기억으로 눌러둘 수 없는 풍경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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