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열풍 속 다시 찾은 남도 유배지 <5.정약용>
강진 주막 할머니·혜장이 건넨 위로의 손길
고립된 천재를 다시 일으킨 헌신
무명의 민초들 함께 쓴 조선 인문학의 정수

편집자주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대한민국에 '유배 문화'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권력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이 마주했던 고립과 절망은 역설적이게도 남도의 너른 품 안에서 위대한 학문과 예술로 승화됐다. 아시아경제 호남취재본부는 영화 속 서사를 넘어 실제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광주·전남의 주요 유배지를 톺아본다. 척박한 땅을 희망의 터전으로 일궈낸 선비 정신과 오늘날 '예향 남도'의 뿌리가 된 유배 문화의 가치를 총 6편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26일 오후 전남 강진군 강진읍에 위치한 사의재에 단체 관람객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민현기 기자

26일 오후 전남 강진군 강진읍에 위치한 사의재에 단체 관람객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있다. 민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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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업적 뒤에는 언제나 묵묵히 자리를 지킨 조력자들이 있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 속 주인공이 고립된 환경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동력이 주변의 따뜻한 시선이었듯, 조선의 대유(大儒) 다산 정약용을 만든 것은 강진의 주막 할머니와 해남의 외가 사람들이었다.


"어찌 공부를 놓으려 하느냐"…주막 할머니가 연 '사의재'의 기적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지금은 정갈하게 복원된 '사의재(四宜齋)' 마당에 서면 1801년 겨울의 스산한 풍경이 그려진다. 대역죄인으로 몰려 강진 땅에 내던져진 다산에게 선뜻 방 한 칸을 내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이 동문 밖 주막의 이름 없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절망에 빠져 끼니조차 거르던 다산에게 국밥 한 그릇을 내밀며 호통을 쳤다. "선비가 어찌 공부를 놓으려 하느냐"는 무지렁이 할머니의 꾸짖음은 다산의 심장을 때렸다. 다산은 이곳에서 '네 가지(생각·용모·언어·동작)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의 사의재를 짓고 비로소 학문의 끈을 다시 잡았다. 고립된 천재를 깨운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닌, 남도 여인의 투박하지만 뜨거운 '정'이었다.

26일 오후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에서 부부 관람객이 자유롭게 관람하고 있는 모습. 민현기 기자

26일 오후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에서 부부 관람객이 자유롭게 관람하고 있는 모습. 민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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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밖 주막집에서 시작된 학문의 횃불"…최초의 제자들과 '황상'

사의재는 단순한 유배객의 거처를 넘어, 절망에 빠진 다산이 세상과 다시 소통하기 시작한 '최초의 학교'였다. 주막 할머니의 권유로 마음을 다잡은 다산은 이곳에서 강진의 아치실 소년 황상을 비롯한 6명의 제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중앙 정계에서 버림받은 대역죄인에게 자식을 맡긴다는 것은 강진 사람들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다산은 사의재의 좁은 골방에서 제자들에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는 '삼근계(三勤戒)'를 내리며 학문의 엄격함을 가르쳤다. 특히 훗날 다산의 가장 충직한 제자가 된 황상은 스승이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사의재에서 배운 가르침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주막집 골방에서 피어오른 촛불 아래, 유배객과 남도 소년들이 함께 나눈 문답은 훗날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의 시발점이 됐다.

"공부 기운 받으러 왔어요"…민초들이 일군 인문학의 성지

이날 사의재 마당에서 만난 이 모 씨(49·여)는 아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을 둔 이 씨는 "다산 선생님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문의 꽃을 피우신 곳이라 기운이 남다를 것 같아 왔다"며 "주모의 따뜻한 정이 다산을 살린 것처럼, 우리 아이도 주모의 넉넉한 인심과 공부 기운을 듬뿍 받아 입시를 잘 치렀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웃어 보였다.


사의재를 중심으로 조성된 주변 콘텐츠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특히 인근에 조성된 '추억의 테마거리'는 중장년층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부산에서 단체 여행을 왔다는 50대 관람객 정 모 씨는 "사의재에서 다산의 역사를 보고 나오니 바로 옆에 옛날 영화 명대사와 컨셉을 전시해놓은 거리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우리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의 볼거리가 많아 동창들과 사진도 찍고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호평했다.


"콘텐츠는 풍성하지만…'강진표 유배 브랜드' 확립은 숙제"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 인근에 자리잡은 '추억의 테마거리'와 한옥 카페들이 들어선 모습. 민현기 기자

전남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 인근에 자리잡은 '추억의 테마거리'와 한옥 카페들이 들어선 모습. 민현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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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현장에서는 사의재가 가진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 부족하다는 아쉬운 목소리도 나왔다. 최근 영화 '왕사남'의 배경인 영월이 '유배와 고립'이라는 컨셉을 하나의 거대한 서사적 브랜드로 안착시키며 전국적인 명소로 급부상한 것과 대조적이라는 지적이다.


사의재와 추억의 테마거리가 각각의 볼거리는 훌륭하지만, 이를 하나로 꿰어 '강진만의 유배 서사'로 전달하는 브랜드 파워가 아직은 미흡하다는 분석이다.


이날 단체 관람객을 이끌고 가이드로 나선 정지선(46) 씨는 "영월이 영화적 상상력을 입혀 유배 문화를 대중화한 것처럼, 강진 역시 다산과 주모, 제자 황상으로 이어지는 인간적인 연대를 현대적 감각의 브랜드로 재탄생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순히 "잘 꾸며놓은 공간"을 넘어, 관광객들이 "다산의 삶 속으로 들어온 듯한" 몰입형 브랜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진군은 이 같은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며, 사의재를 중심으로 한 역사 관광의 열기를 독보적인 유배 브랜드로 확장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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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관계자는 "관광객들이 사의재에서 다산의 정신을 배우고, 테마거리에서 추억을 회상하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역사적 자산에 현대적인 감성을 입힌 콘텐츠를 적극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호남취재본부 민현기 기자 hyunk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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