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사진계의 큰 별들이 잇따라 졌다. 필립 퍼키스, 세바스티앙 살가두, 마틴 파, 윤주영, 육명심…, 우리가 사진을 하면서 표본으로 삼고 추종했던 분들이다. 많은 사진가들의 스승이었던 필립 퍼키스의 사진은 얼핏 황량하고 무심하다. 그리고 우울하다. 사진이 우울한 것이 아니라 사진이 감정의 거울이라면 그렇게 보일 것이다. 사진만으로 사진가의 내면과 성향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사진으로 드러나는 그의 시각과 표현의 정조는 우울과 회의를 몸으로 느끼게 한다. 우울도 회의도 주관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좀처럼 일지 않는 마음의 격랑과 척박한 정조가 오히려 즉물적인 감흥을 요구하지 않아서 편하다.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 우울과 좌절로 오랫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던 퍼키스가 다시 찍은 말년의 사진들 중 하나. 사진집 '노탄'에 수록돼 있다. '흰색이 검은색 보다 중요하지 않고 검은색은 흰색 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개념의 '노탄'. 평면적 사진에 담긴 감정은 역설적으로 깊다. 안목출판사 제공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 우울과 좌절로 오랫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던 퍼키스가 다시 찍은 말년의 사진들 중 하나. 사진집 '노탄'에 수록돼 있다. '흰색이 검은색 보다 중요하지 않고 검은색은 흰색 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개념의 '노탄'. 평면적 사진에 담긴 감정은 역설적으로 깊다. 안목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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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저서 '사진강의 노트'에서 더 많이 담아내고자 하는 의욕의 무용함을 은연중에 이야기했다. 감각을 단련하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핵심임을 그의 책을 통해 실감했다. 사진집 '인간의 슬픔(The Sadness of Men)' 또한 슬픔을 말하지 않고 눈앞의 사실들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다. 어떤 과장도 없이 육신과 시야를 움직여 사실의 한가운데 혹은 한구석에 서서 보여줄 것을 보여주고 숨길 것은 숨긴다. 사진이 본래 하는 일이 그런 것임에도 세상에는 본질을 뛰어넘은 이미지만 넘쳐난다. 그의 사진은 그저 알듯 말듯하고 황량한 여백에서 볼 만큼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체념하거나 기다리라 한다.

멕시코 작업 중에서

멕시코 작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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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환자들은 세상을 너무도 명료하게 보기 때문에 맹목성이라는 선택적 이점을 상실하고 만다'고 앤드루 솔로몬이 '한낮의 우울'(민음사)에 썼다. 우울과 회의가 늘 부정과 파멸을 향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울을 알 필요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제도권 사회에서 자기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데 좌절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우울한 사람들은 그 주저하는 시간들이 가져다준 사유와 반추의 이점이 있다. 절망의 수준이 아니라면 우울도 잘 쓰면 약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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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슬픔(Sadness of Men)' 중에서

'인간의 슬픔(Sadness of Men)'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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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단정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데 인간은 단정하고 언어로서 구속하고자 한다. 퍼키스의 사진에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허영한 사진팀장 youngh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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