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데이터의 시대, 이야기의 귀환
데이터 시대에 다시 커지는 '서사의 힘'
숫자가 넘칠수록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멧돼지와 바다소가 우연히 만났다. 둘 모두 달리기를 좋아했다. 틈만 나면 서로 경주하면서 승부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소가 다리를 다쳐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됐다. 바다소가 슬퍼하자 친구인 멧돼지도 마음이 아팠다. 고민하던 멧돼지가 등을 내밀어 바다소를 업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로 들어갔다. 바다소는 힘을 되찾았고, 물속에서 둘은 헤엄치며 경주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필리핀 아그타족의 옛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이질적 존재들의 우발적인 만남을 연민과 협동, 우애와 환대의 이야기로 바꾸어 간다. 대니얼 스미스 영국 UCL 교수에 따르면, 옛이야기는 사회적 협력을 촉진하고, 인간적 연민과 공감, 정의와 평등 같은 윤리 규범을 가르치는 강력한 수단이다.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은 더 관대해지고, 더 친절해지며, 기꺼이 남을 도우려 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 존중받고, 훌륭한 이야기가 넘쳐날수록 그 사회는 더욱 인간다운 사회가 된다. 스미스는 아그타족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험에서 이를 밝혀냈다.
먼저 스미스는 아그타족 마을들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을 숫자 제한 없이 추천하는 투표를 진행했다. 추천된 이야기꾼 숫자는 마을마다 달랐다. 그런 다음 사람들은 토큰을 최대 12개 받았다. 토큰 하나당 쌀 8㎏과 바꿀 수 있었다. 사람들은 토큰 전체를 혼자 가질 수도,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평균 62.6%의 토큰을 자기를 위해 보유했다. 그러나 마을마다 차이가 났다. 어느 마을이든 추천된 이야기꾼 수가 1% 늘 때마다 분배되는 쌀의 양이 2.2% 증가했다. '멧돼지와 바다소' 같은 이야기가 우애의 힘을 깨닫게 하고, 협력과 협동의 문화를 진흥한 까닭이다.
이야기는 어지러운 세상을 이해시켜 주고, 공허한 인생에 가치를 부여한다. 좋은 이야기 없이 살 수 없음을 알기에 사람들은 어려운 이야기꾼을 도왔다. 자기 토큰을 양보할 때, 이야기꾼에게 먼저 나누어주었다. 또 사람들은 사냥이나 채집을 잘하는 사람보다 이야기꾼과 살기를 두 배 이상 더 바랐다. 맛있는 음식을 풍족하게 먹는 것보다 영혼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소중히 여긴 것이다.
그러나 멋진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은 매우 힘이 든다. 숙달될 때까지 긴 시간 훈련받아야 하고, 창작 과정에도 신체적?정신적으로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스페인 작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책상으로 가기가 너무 싫어 아침마다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기도 했다.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이야기꾼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전문직에 속한다.
이야기는 정보를 맥락과 결합할 때 생겨난다. 이야기꾼은 파편적 사건들을 정렬하고 방향을 부여해서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이야기로 바꾼다. 이렇듯 의미화하는 힘이 없을 때, 인간은 허무에 빠져서 순간적 자극에 목매는 데카당으로 전락한다. 니체는 이를 신의 죽음으로 불렀다. 숫자와 데이터가 이야기를 대체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삶의 갈피를 잃고 헤맨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사회는 이야기꾼의 힘을 빼앗아 왔다. 이야기보다 도표나 그래프, 통계와 데이터를 앞세웠다. 오래전이지만 '빠름, 빠름, 빠름'이라는 한 통신사 광고 카피는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빠름이 우리 삶에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는 공허한 독백일 뿐이다. 사람들은 사실 자체보다 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관심이 있다. 이를 함께 말하지 않을 때 사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않는다.
'콘테이저스'(문학동네)에서 조나 버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말했다. "인간 사고는 정보 단위보다 이야기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꿰어진 이야기는 항상 정보보다 위대하다. 숫자와 데이터만으로는 아무리 위대한 메시지도 퍼지지 않는다. 메시지를 숫자로 설득할 때보다 이야기를 통해 전달할 때 사람들은 22배나 더 잘 기억한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관한 정보를 한 편의 풍부한 이야기로 엮어 전하는 경우에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거기에 깊은 일체감을 느낀다.
최근 들어 첨단 기술 기업들이 새삼 이야기의 힘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기업들이 '이야기꾼'을 절실히 찾고 있다." 2025년 말, 미국 경제 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엔비디아, 노션 등이 작가, 기자 등 이야기 전문가를 채용해 다양한 브랜드 콘텐츠를 제작해서 블로그, 팟캐스트 등을 통해 내보내고 있다는 내용이다.
구글은 '스토리텔링 매니저' 직책을 신설했다. 클라우드 도입이 기업 문화를 어떻게 바꿨는지를 알리는 성공 서사를 퍼트리기 위해서다. 엔비디아는 유명 언론사 기자를 채용해 뉴스룸과 블로그를 맡겼다. 기술 언어로 이루어진 인공지능(AI) 관련 소식을 대중과 투자자가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화하는 게 목적이다. 노션은 커뮤니케이션,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 기능을 '스토리텔링 팀'으로 통합했다. 링크드인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이야기꾼이라는 말이 포함된 채용 공고가 두 배로 늘었다.
기업들이 새삼 이야기꾼을 찾는 이유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탓이다. 전통 미디어의 힘이 약화하고, 채널이 파편화?다양화하면서 기업들은 소비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더욱이 AI가 생성한 평균적?기계적 문장이 넘쳐나면서, 독특한 체험과 인간적 공감을 담은 독창적 이야기가 브랜드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척도가 됐다.
게다가 AI, 클라우드 같은 최신 기술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낯설고 어렵다. 숫자와 데이터로 접근하는 건 오히려 이들의 충성도를 떨어뜨리기 쉽다. 이야기는 복잡한 기술적 데이터를 고객의 삶과 이어주면서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도록 돕는다. 미국의 이야기 컨설턴트 리사 랜들은 말했다. "이야기는 사실에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그 사실이 의미 있고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문지기 역할을 한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우리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애와 협력을 증진하고, 일체감을 길러왔다. 이야기엔 한 개인의 순간적?파편적 체험을 공동체 전체의 경험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기업들이 이야기꾼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내보낼지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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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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