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는 강화·경제성은 미확보
제조업 전반 흔드는 구조적 전환 시작

새벽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제철소. 거대한 고로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불빛은 여전히 산업의 심장처럼 뛰고 있지만, 그 익숙한 풍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탄소를 줄여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철강 생산 방식 자체가 근본적인 전환의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지금, 기술이 아니라 '생존 방식'을 다시 묻는 고민이 시작되고 있다.


포스코 포항제철소 2고로에서 한 직원이 용광로에서 쇳물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연합뉴스

포스코 포항제철소 2고로에서 한 직원이 용광로에서 쇳물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연합뉴스

AD
원본보기 아이콘

28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철강사들이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저탄소 전환 전략을 일제히 공식화하면서 산업 전반이 변곡점에 들어섰다. 수소 기반 생산 체제와 전기로 확대, 탄소 저감 기술 투자 등 방향은 명확하지만, 현장에서는 그 이면의 부담이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수소환원제철이다. 석탄 대신 수소를 활용해 철을 만드는 이 방식은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차세대 공정으로 꼽힌다. 그러나 기술이 현실로 자리 잡기까지 넘어야 할 장벽은 높다. 업계에서는 현재 기준으로 기존 고로 대비 생산 원가가 2배 이상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시장이 그 비용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다. 철강은 자동차·조선·건설 등 산업 전반에 쓰이는 기초 소재로, 가격 경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같은 품질의 철강을 두 배 가격에 구매할 수요처는 많지 않다"며 "친환경이라는 이유만으로 비용을 전가하기는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더 큰 고민은 '지금의 설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다. 탄소 배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신규 고로 건설은 사실상 막혀 있는 상황이다. 반면 기존 고로가 수명을 다할 경우 이를 대체할 기술은 아직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현장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멈춰 서기도 어려운 상태"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기존 설비를 유지하기에는 규제가 부담이고, 친환경 설비로 전환하기에는 비용이 감당되지 않는 '양쪽 압박'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철강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철강은 제조업 전반을 지탱하는 기반 소재다. 공급이 흔들리거나 가격이 급등할 경우 자동차, 조선, 건설 등 연관 산업 전반으로 충격이 확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글로벌 경쟁 환경도 부담을 키운다. 중국은 여전히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친환경 전환 속도 역시 자국 산업 상황에 맞춰 조절하고 있다. 국내 철강사들이 비용 부담을 안고 전환을 서두를수록 가격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방향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탄소중립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며, 글로벌 공급망에서도 점점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속도와 방식에 대한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친환경 전환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지만 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추진돼야 한다"며 "지금처럼 비용과 규제가 동시에 작용하면 투자 의욕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철강 산업은 지금, 두 개의 축 사이에서 균형을 요구받고 있다. 하나는 환경이라는 시대적 과제, 다른 하나는 산업 경쟁력이라는 현실이다.

AD

붉게 타오르던 고로의 불빛이 사라질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질지. 그 답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철을 만드는 방식의 변화가 곧 산업의 질서를 다시 쓰는 과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