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고독이 빚어낸 묵향…유배 문화가 틔운 남종화의 꽃
왕사남 열풍 속 다시 찾은 남도 유배지 <4>
소치 허련과 스승들이 일군 남도 예향의 뿌리
풍광·시설 관리 '호평'…콘텐츠 연계는 숙제
"체류형 관광 거점 육성 위해 보강하겠다"
척박한 유배지의 고독은 때로 가장 화려한 예술의 꽃을 피워내는 거름이 됐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 속 주인공이 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며 성장을 이루듯, 조선 후기 남도의 끝자락 진도는 수많은 유배객이 흘린 눈물과 묵향이 뒤섞여 '예향'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잉태했다. 그 중심에는 남종화의 성지로 불리는 '운림산방'과 이곳을 일군 소치 허련, 그리고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은 유배 지식인들이 있다.
흐린 하늘 아래 잠긴 묵향…운림산방의 오후
24일 오후 찾은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 첨찰산 자락 아래 자리 잡은 이곳은 이름 그대로 '안개가 구름처럼 숲을 이룬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날은 평일 오후인 데다 다소 흐린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산방 입구부터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왕사남' 열풍으로 시작된 남도 인문학 기행의 열기를 실감케 했다.
연못 '소치지'에 비친 배롱나무와 정갈하게 정돈된 잔디밭은 마치 갓 그려낸 수묵화의 여백처럼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은 소치 허련이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초가집을 짓고 머물던 곳이다. 산방 뒤편의 울창한 상록수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유배객의 쓸쓸함과 예술가의 집념을 동시에 실어 나르는 듯했다.
유배객이 가져온 한양의 문풍…섬 소년 허련을 깨우다
진도는 조선 시대 수많은 정치가와 학자들이 거쳐 간 '유배의 섬'이었다. 이들은 비록 몸은 속박됐으나, 머릿속에 담아온 한양의 세련된 문인화풍과 학문적 식견은 섬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오히려 밀도 있게 응축됐다.
당시 진도에 유배해 왔던 초의선사와 그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추사 김정희는 섬 출신의 무명 화가 허련을 '소치(小痴)'라 부르며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추사는 제주 유배라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제자 허련의 자질을 아꼈고, 자신의 서화 기법과 예술 철학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는 추사의 극찬은 단순히 제자에 대한 애정을 넘어, 유배지라는 고립된 환경이 만들어낸 예술적 성취에 대한 확신이었다. 소치는 스승을 만나기 위해 거친 바다를 건너 제주를 수차례 오갔고, 그 고통스러운 여정 속에서 유배객의 고독이 어떻게 필력으로 승화되는지를 목격했다.
"시설 관리는 만점인데"…관광객들 호평 속 아쉬움
이날 현장에서 만난 관람객들은 운림산방의 수려한 풍광과 철저한 관리에 입을 모아 찬사를 보냈다.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이 모 씨(45·광주광역시)는 연신 "와 잘해놨다"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잔디부터 조경 시설들이 전체적으로 정말 관리가 잘 돼 있다. 부모님을 모시고 오기에도 좋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돈된 느낌"이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뛰어난 '하드웨어'에 비해 '소프트웨어'와 홍보가 부족하다는 날카로운 지적도 이어졌다. 수도권에서 온 관광객 박 모 씨(38)는 "이 정도 시설과 역사를 가진 곳이라면 전국적인 명소가 될 법한데, 막상 오기 전까지는 홍보가 덜 되어 잘 몰랐다"며 "수도권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인데 인지도가 낮은 것이 아쉽다"고 전했다.
특히 운림산방 하나만 보고 가기에는 주변 연계 콘텐츠가 빈약하다는 점이 큰 숙제로 꼽혔다. 한 관광객은 "여기만 보고 가기에는 아쉬워 밥이라도 한 끼 먹으려 하면 마땅한 곳을 찾기 어렵다"며 "맛집이나 연계 시설을 찾아보면 결국 목포 등 인근 도시로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진도 안에서 즐길 거리가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진도군 "연계 인프라 구축·공격적 마케팅 강화할 것"
이 같은 현장의 목소리에 대해 진도군 관계자는 운림산방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보완책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운림산방은 남도 예술의 정수를 간직한 곳인 만큼 최상의 관람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시설 관리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며 "다만 홍보 부족이나 먹거리 연계 등의 아쉬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운림산방 주변을 단순한 관람지가 아닌 체류형 관광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진도 내에서 숙식과 관광이 한 번에 해결될 수 있는 관광 벨트를 구축해 관광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겠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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