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15년 더 버텨야 한다"…직원 수백명 이끌던 대기업 임원도 '알바 면접'
은퇴 이후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일하는 고령층
2차 베이비붐 세대 은퇴로 일자리 지형도 변화
"중장년층 위한 재취업 정책 상대적으로 부족"
"딸과 함께 나오지 않으면 주문도 못 했던 제가 이제는 '키오스크 선생님'이랍니다."
서울역의 한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시니어 크루'로 일하고 있는 최원석씨(64)는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리는 손님이 보이자 곧장 다가가 주문을 도왔다. 백발의 노신사가 능숙하게 메뉴 주문을 돕자 이를 바라보던 젊은 손님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은 놀랍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20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다 50대에 일찌감치 은퇴한 최씨는 자영업과 각종 아르바이트를 거쳐 이 자리에 섰다. 그는 "점장님이 차근차근 알려준 덕분에 이제 딸 같은 손님을 도와줄 때도 있다"며 "여러 차례 '친절사원'으로 선정된 게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열린 KFC 파트타이머 채용설명회에는 최씨처럼 은퇴 이후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든 중장년층 구직자 120여명이 몰렸다. 한때 직원 수백명을 이끌었다는 '10대 건설사' 임원 출신 최모씨(58)도 아르바이트 면접 순서를 기다리는 지원자 중 하나였다. 최씨는 "기업에서 오히려 경력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면서도 "그래도 일손을 놓고 싶지 않아 기회가 오면 계속 도전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설명회 내내 노트에 내용을 빼곡히 받아 적던 송영근씨(57)는 면접 준비사항을 적어 온 메모를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LG패션 매장의 판매원으로 일하다 관련 사업을 해왔다는 송씨는 "열아홉 살에 KFC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이제 정규직이 목표"라며 웃어 보였다.
954만명에 달하는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의 은퇴가 본격화하면서 중장년층의 일자리 지형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패스트푸드 매장 아르바이트부터 스쿨버스 기사, 기부 플래너 등 '인생 2막'을 위해 일터를 다시 찾는 수요가 늘면서 제2의 취업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20일 고용노동부 고령자 고용동향에 따르면 고령자 고용률은 지난해 70.5%까지 오르면서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70% 선을 돌파했다. 고령자 고용률은 55~64세 인구 중 일주일에 1시간 이상 일하는 취업자 비율이다. 고령자 경제활동 참가율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구직 의사를 가진 실업자까지 합친 이 항목 역시 지난해 72.0%를 기록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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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가 다시 일자리를 찾는 건 은퇴 이후 연금 수령 시점까지 이어지는 '소득 크레바스(공백)' 때문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국가데이터처 통계를 분석한 결과, 정년 이후 평균 소득 공백 기간은 약 15년에 달했다. 하지만 청년·노인을 위한 고용지원제도가 마련된 것과 달리 '은퇴 혹은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을 위한 재취업 정책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후 준비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아 은퇴 후 구직활동을 하는 2차 베이비붐 세대가 늘고 있다"며 "고령 스튜어디스가 활약하는 서구 사회에 비해 우리나라는 정책적 장려와 사회적 인식 변화가 부족하다"고 짚었다. 이어 "젊은 층은 중심적인 일자리로 이동하고 고령층은 유연한 노동시간이나 보조적 역할을 맡는 식의 균형이 요구된다"며 "패스트푸드점 등 서비스 일자리에 고령자가 참여하는 식의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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