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있는 한 호텔의 대회의실이 가득 찼다. 자산운용사 아폴로 글로벌매니지먼트가 개최한 연례 투자자 회의였다. 겉보기엔 여느 행사 만찬장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이 경영하는 물류 기업에서 감지한 소비 위축 신호를 꺼내놓고, 누군가는 에너지 섹터의 이상 수치를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이들은 아폴로가 보유한 포트폴리오 기업의 수장과 핵심 의사결정자들이다. 아폴로는 이 자리를 매년 만든다. 그리고 이들을 '인간 도서관'이라 부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살아있는 정보의 집합소다. 까다로운 딜 하나를 검토할 때, 규제와 정보 장벽에 막힐 때, 아폴로는 내부에서 필요한 '책'을 꺼냈다. 그렇게 '인간 도서관'은 아폴로에 각종 정보와 인맥의 우위를 제공했고, 이는 아폴로가 "최대한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지원"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도서관은 두꺼워지고, 도서관이 두꺼울수록 더 좋은 결정을 더 빠르게 내릴 수 있었다(세상을 움직이는 사모펀드 이야기, 사친 카주리아).


[초동시각] 규모가 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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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대체투자 운용사 블랙스톤은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논리를 실현한다. 운용자산 1조3000억달러, 270개 기업과 전 세계에 1만3000개 부동산을 갖고 있다. 블랙스톤은 지난해 4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우리 포트폴리오에서 나오는 실시간 데이터는 연방준비제도(Fed)보다 빠를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가진 글로벌 자산 네트워크가 가진 데이터는 매크로 변화를 남들보다 먼저 감지하게 해준다. 규모 자체가 정보가 되고, 그 정보가 다시 더 나은 투자 판단으로 이어진다.

한국 사모펀드 시장은 2004년 문을 열었다. 20년 동안 기업 구조조정과 산업 재편의 중심에 섰다. 부실기업을 살리고, 경영권을 정리하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는 일을 묵묵히 해왔다. 그 역할은 작지 않았다. 그러나 글로벌 PE와 비교하면, 한국 PE가 골몰하는 규모의 경제는 덩치 그 자체에 머물러 있다. 규모를 키워 비용을 줄이고 시장 지배력을 높이는 방식이다.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가 SK렌터카를 보유한 상태에서 롯데렌터카 인수를 시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한국 PE 시장의 역사가 짧고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이 작다. 포트폴리오 기업의 수가 적으니 축적되는 데이터도 한정적이다. 인력 풀도 아직 얕다. 그러나 구조적 한계가 방향의 부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글로벌 PE는 규모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단계에 와 있다. 규모를 통해 정보를 쌓고, 판단력을 키우고, 그 판단력이 다시 더 큰 규모를 만드는 선순환. 인공지능(AI)과 초양극화의 시대에 그 선순환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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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는 차갑고 탐욕스러운 자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PE 투자의 수익을 그들이 독점하는 것도 아니다. PE 투자의 큰손은 국민연금, 교직원공제회, 군인공제회 등 기관투자가들이다. 즉 최종 수익자는 국민이다. 한국 PE가 더 정교한 판단을 내리고 더 좋은 투자 성과를 낼수록, 그 과실은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 규모의 경제를 고도화하는 일은 업계의 성장 전략이기 이전에 그 돈을 맡긴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기도 하다. 지난 20년간 급속히 성장한 한국 PE 시장은 세대교체와 함께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이 성장통 끝에, 네트워크·데이터 차원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국민 노후를 더 든든하게 해줄 한국형 글로벌 PE들이 대거 나타나길 기대한다.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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