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명분 비웃는 테러범…곪아가는 '무관심'이 진짜 뇌관[슬레이트]
취조실 심리전 다룬 스릴러 '폭탄'
이상동기 범죄 앓는 사회의 카운트다운
은둔 청년 안은 한국 사회에도 서늘한 경고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영화 '폭탄'은 도쿄 도심에서 벌어지는 연쇄 폭발을 다룬 스릴러다. 그런데 사건의 주요 무대는 시내 한복판이 아닌 비좁은 취조실이다. 가벼운 상해 혐의로 체포된 중년 남성 스즈키(사토 지로)가 돌연 도심 곳곳에 기폭 장치가 설치됐다고 말하면서 심리전이 펼쳐진다.
그는 담당 형사 루이케(야마다 유키)에게 시민의 목숨을 인질 삼아 기괴한 퀴즈를 낸다. 제한 시간 내에 정답을 찾지 못하면 도심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문제들은 하나같이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보편적 대전제를 비웃는다. 다수의 안전을 위해 누구의 목숨을 포기할 것인지 끊임없이 저울질하게 만들며 공권력의 얄팍한 위선을 시험한다.
폭탄 테러라는 극단적 설정은 일본 사회의 병폐를 정조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잔혹한 문답을 통해 대중의 이기적인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밑바탕에는 점점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소외와 무관심이 깔려있다. 억눌린 분노와 연결해 이른바 '무적의 사람'이 품은 적의가 얼마나 거대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고립된 개인이 사회를 위협하는 괴물로 변모하는 과정은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2019)'와 많이 닮아있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방아쇠를 당겨 대중의 위선을 고발했다면, 스즈키는 폐쇄된 취조실 안에서 스무고개와 흡사한 놀이로 경찰과 언론은 물론 시민들의 민낯을 들춰낸다.
질문이 이어질수록 딜레마는 짙어진다. 특정 계층의 희생을 담보로 다수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트롤리 딜레마 앞에서 견고해 보이던 도덕적 명분이 단숨에 무너진다. 시민들은 이기적인 군중심리를 드러내며 연대하지 않고, 공권력 또한 시민의 안전보다 조직의 체면 유지와 책임 회피에 매달린다. 대중과 시스템이 동시에 바닥을 드러내자, 평정심을 유지하던 루이케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도심을 뒤흔든 사태의 주동자는 타고난 절대 악이 아니다. 가족의 치부가 매스컴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면서 사회와 철저히 단절된 평범한 소시민이다. 침묵하며 웅크린 약자에게 시스템은 어떤 구원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다. 그가 대도시 전체를 인질로 삼고 나서야 비로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가상의 붕괴는 일본을 넘어 한국 사회의 현실과도 무겁게 포개진다. 정부 추산 54만 명에 달하는 고립·은둔 청년 문제와 연이은 이상동기 범죄의 궤적이 그 증거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관계망을 잃은 이들을 시스템이 개인의 부적응으로 치부하고 방치한다. 이때 깊어지는 단절감은 소외와 빈곤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로 폭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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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드러난 범죄를 진압하는 사후 대응으로는 곪아가는 위기를 걷어낼 수 없다. 구조적 배제가 낳은 만성적인 고립과 빈곤은 이미 사법 체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다. 어쩌면 진짜 폭탄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얼어붙은 현실 속에서 지금도 조용히 카운트다운을 이어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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