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뒷감당 떠안은 동맹국
트럼프가 던진 한국외교 시험지
무조건적 수용보다 냉정한 판단
혹시나 하던 두려운 청구서가 결국 날아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동맹들에 호르무즈 해협으로 해군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우리와 일본, 중국,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 대상이다.
지난달 28일 미국이 이스라엘과 함께 이란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의 뒤처리를 동맹들에 노골적으로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의 여파로 유가 및 물가상승 등 갖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무턱대고 응할 수도, 그렇다고 북한의 위협 앞에 여전히 주한미군에 의존하는 현실에서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다. 그러나 바로 이런 순간일수록 '파병이냐 거부냐'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눈앞의 압박에 떠밀려 성급한 선택을 하기보다, 상황 전체를 조망하고 흐름을 읽으면서 복수의 선택지를 냉정히 따져야 할 때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미국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난 11월 발표된 국가안보전략에도 중동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는 방침이 명문화돼 있다. 그렇다면 왜,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공격에 나섰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정보력, 미군의 압도적 타격 능력, 그리고 인공지능(AI) 기반의 신속한 표적 획득 능력을 믿고 역대 미국 대통령도 결단하지 못했던 이란 공격을 감행했다. 지도부와 핵심 전력을 무너뜨리면 베네수엘라처럼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내부의 만류도 있었다. J.D. 밴스 부통령은 'MAGA'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했고, 댄 케인 합참의장은 장기전 불가피를 경고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성공에 도취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란은 또 하나의 만만한 표적으로 보였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낙관적 전망을 주입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정치적 역량도 분명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백악관 수뇌부의 당초 구상에 있어 미국 본토가 위치한 서반구를 미국 세력권으로 확고히 다지고 경쟁자를 배제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에 비하면 전략적 중요성이 낮아진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이란을 약화시킨 뒤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격 대상이 되는 이란과 베네수엘라의 약화가 결과적으로 중국 견제에도 도움이 된다는 판단 역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이 전략의 치명적 허점은, 전혀 다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가진 이란과 같은 국가에는 먹히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국민을 탄압하고 빈곤으로 내몰았던 독재자는 이제 신성한 순교자가 됐다. 이란은 주변국 무차별 공격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포함한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하고 있다. 강경파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면서 전쟁은 장기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이제 실속 없이 길어지고 있는 이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 출구전략의 핵심에는 바로 호르무즈 해협의 정상화가 있다. 해협이 열려야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내세운 안보전략으로 되돌아갔다. 스스로를 지키고 응분의 역할을 다하는 동맹국만이 미국의 안보 우산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원칙이다. 셰일 혁명으로 에너지를 자급하는 미국에 호르무즈 해협은 더 이상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이 아니다. 세계 원유 유통량의 20%가 이 좁은 수로를 통과하지만, 정작 이 해협에 목을 매고 있는 나라는 한국, 일본, 중국, 인도 같은 아시아 국가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미국의 보장 아래 가장 큰 혜택을 누려온 나라들이 이제 상응하는 비용을 치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군함 파견은 어느새 '누가 진정한 동맹국인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돼버렸다.
요구받은 나라들 가운데 우리 처지가 가장 궁색하다. 유럽은 중동산 에너지 의존도가 낮아진 만큼 버틸 여지가 있다. 중국은 애초부터 거부할 것이 자명하다. 일본은 분쟁지역 개입을 금지한 평화헌법을 방패로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중동산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우리는 손쉽게 거부하기 어렵다. 거부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나 관세 인상 등의 카드를 꺼내 들며 압박 수위를 높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구에 무조건 응하는 것이 능사도 아니다. 파병이냐 거부냐, 둘 중 하나만 있는 것처럼 선택을 몰아가는 구도 자체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현실적 논거는 적절한 해군 전력 부재다. 해군의 자랑인 세종대왕급은 탁월한 방공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이상 다른 곳에 내보낼 수 없다. 이순신급 구축함은 그간 해외 파병에 활용해 왔지만, 드론과 탄도미사일이 교차하는 고강도 전장에 투입하기엔 방어 능력이 버겁다. 인천급 호위함은 장거리 작전에 적합하지 않고, 독도급 상륙함도 충분한 방공 지원 없이는 손쉬운 표적에 불과하다. 협조하고 싶지만 보유 전력의 현실적 한계가 있다는 수사는 부끄럽지만 현실이다. 어쩌면 민망한 이 사실이 우리가 꺼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카드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급유함과 보급함 등 나름의 대안을 제안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촉발한 이란 전쟁은 중동의 판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안보와 경제 지형까지 흔들고 있다. 우리는 이제 방관자가 아닌 당사자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동맹이 요청할 때 응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사는 괘씸하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현실 또한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곤혹스럽다는 이유로, 혹은 압박이 두렵다는 이유로 성급히 이분법적 선택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동맹과 국익, 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들 수 있는 제3의 출구를 찾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외교가 풀어야 할 진짜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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