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영웅주의 공식 깨고 과학의 본질인 협력과 검증 복구
종의 장벽 넘은 두 존재의 사투, 분열된 현실 향한 묵직한 일침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 컷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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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멸종 위기를 맞는다. 지구가 빙하기에 돌입해서다. 태양 에너지를 갉아먹는 미세 생명체 아스트로파지가 무서운 속도로 번식한다. 생존의 실마리를 찾고자 머나먼 타우 세티 항성계로 편도나 다름없는 우주선이 떠난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이 절망적인 자살 임무를 떠밀려 맡은 라일랜드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평범한 중학교 과학 교사인 그는 긴 수면의 부작용 탓에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함께 탑승한 동료들이 모두 숨을 거둔 참혹한 선내를 마주한다. 철저하게 고립된 우주선 안에서 홀로 지구의 운명을 짊어지며 치열한 생존기를 시작한다.

칠흑 같은 우주에서 그레이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지구와 비슷한 위기에 처한 에리다니 행성의 외계인과 조우한다. 그 역시 아스트로파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으로 날아왔다. 이동 중 동료들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은 처지까지 똑같다. 그레이스는 돌(rock)처럼 단단한 껍질을 가진 그에게 '로키(Rocky)'라는 이름을 붙인다.


생존 조건이 완전히 다른 두 생명체는 서로의 언어를 배우며 합동 연구를 시작한다. 그레이스가 이론을 제시하면, 엔지니어인 로키가 필요한 장비를 즉각 만들어내는 식이다. 깊어지는 유대 속에 각자의 행성을 구하겠다는 목적을 넘어 서로의 유일한 구명줄이 돼준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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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 로드와 크리스토퍼 밀러 감독은 앤디 위어의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영리하게 옮겨놓았다. 광활한 우주의 개방감과 선체 내부의 폐쇄성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시각적 쾌감을 끌어올렸다. 더불어 차갑고 현학적으로 흐르기 쉬운 하드 공상과학(SF)의 뼈대 위에 재치를 입혀 극의 완급을 조절했다. 특히 치열한 생존 투쟁 속에서도 두 존재가 주고받는 경쾌한 호흡은 숨 막히는 전개에 숨통을 틔워준다.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소통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짜릿한 지적 쾌감을 선사한다. 이들은 우주의 보편적 진리인 수학과 물리학을 기준 삼아 기초적인 사전을 구축한다. 이후 로키가 다중 화음으로 의사를 전달하면 그레이스는 직접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를 번역한다. 반대로 그레이스가 인간의 언어로 말하면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로키는 뜻을 곧바로 이해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상대를 향한 이타적인 행동과 논리적인 선택으로 견고한 신뢰를 쌓아 올리며 서사의 밀도를 완성한다.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과학을 대하는 철학적 태도에서 드러난다. 기존 할리우드 영화 상당수는 거대한 우주적 재난을 극복하는 열쇠로 고립된 천재의 번뜩이는 영감을 내세웠다. 걸출한 지성 혼자 해답을 찾아내 세상을 구원하는 편의적인 영웅주의 공식을 답습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이 낡은 문법을 단호하게 깼다. 두 주체가 치열하게 가설을 세우고, 실패와 오류를 수정하며 나아가는 협력의 과정으로 과학을 재정의했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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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와 로키는 지식을 교환하며 각자의 결핍을 메운다. 생물학적 지식이 풍부한 그레이스가 아스트로파지의 진화론적 약점을 분석하면, 공학 기술이 뛰어난 로키는 곧바로 이를 격리할 장치를 제작한다. 이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정답을 향해 나아가는 필수 불가결한 단계다. 이를 잘 아는 두 존재는 상대를 비난하는 법이 없다. 함께 가설을 세우고 변인을 통제하며 결과를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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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치열한 협력의 과정은 진리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계시가 아니라, 합리적 의심과 집요한 교차 검증이 쌓인 노동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타인을 향한 맹목적 공포와 배타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진정한 과학의 본질이자 인류가 나아가야 할 연대의 방향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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