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은 거창한 이념 대립보다 '설마 그 정도는 했겠지'라는 최소한의 믿음이 깨질 때다. 전남 무안공항의 '12·29 여객기 참사' 이후 1년을 넘겨 진행된 잔해물 추가조사 결과가 그랬다.
희생자 7명의 유해 9점·유류품 648점·기체 부품 155점이 추가로 발견됐는데, 방치된 기간이 15개월에 달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재명 대통령은 "사고 초기에 유해 수습이 안 된 경위와 이후 유해가 1년 넘게 방치된 경위를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자를 엄중 문책하라"고 지시했다. 유가족 요청으로 다시 이뤄진 조사에서 나온 이번 결과에 이 대통령은 '매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79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 현장의 유해와 유류품이 장기간 방치된 것은 초기 수습과정이 형편없었다는 증거다. 누가 최종 확인 책임을 졌는지, 부처·기관 간 협력과 인수인계는 어떻게 이뤄졌는지, 현장 판단은 정확했는지, 매뉴얼은 제대로 작동했는지 등 따져 물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뿌리 깊은 '관료화'의 단면을 드러낸 결과물이라는 지적이 이어진다.
이 대통령이 최근 국무회의 등 공식 회의 석상에서 자주 거론하고 있는 '관료화' 문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다. 이 대통령은 "공직사회가 안정화됐지만, 한편으로는 관료화를 조심해야 한다", "초심을 지키는 게 곧 관료화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3월6일,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회의).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도 공직사회가 관료화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재차 당부했다.
이 대통령이 경계한 것은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인 관료제가 어느 순간 자기방어와 책임 회피의 장치로 변질하는 순간이다. 전례가 없으면 멈추고, 책임질 일은 미루고, 윗선의 의중부터 살피는 상태를 의미한다. 평소 겉으로는 질서가 잡힌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위험한 상태다. 당연히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연구를 통해 공공 혁신을 가로막는 문화적 장벽으로 위험회피·위계·칸막이를 지목했다. 국내에서 진행된 연구에서도 '공공 봉사 동기'가 높을수록 조직 내 침묵이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났다. 체념적·방어적 문화는 공무원의 적극 행정을 위축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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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 정도는 했겠지'라는 최소한의 믿음이 깨지는 순간, 국가에 대한 신뢰는 급격하게 무너진다. 신뢰가 무너지면, 수용성이 떨어져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무안 참사 재조사에서 뒤늦게 확인된 것은 15개월이나 방치됐던 희생자들의 유해만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이 그토록 경계하고 있는, 국가가 놓아버린 최소한의 책임도 그곳에 방치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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