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루스 실린더' 첫 인권선언
유대인 포로 종교 자유 허용

[K우먼톡]페르시아의 유산과 이란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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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전쟁도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지금 세계를 뒤흔드는 이란 전쟁이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이유는 치솟는 유가도, 미사일의 위용도 아니다. 폭격 속에서 자식을 잃고, 화염과 연기 속에서 언제 다시 떨어질지 모를 폭탄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평범한 이란 시민들의 고통과 절망이다. 그리고 이란 내부에서 어렵게 자라던 변화의 싹마저 얼어붙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두렵다. 이란의 미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갑작스러운 전쟁의 화염 뉴스는 불과 몇 주 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폐회식장에서 만난 젊은 이란 여성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베드민턴 선수 출신으로 이란 최초의 여성 IOC 위원이 된 소리야 하지아가(Soraya Hajiagha)였다. 주변 인사들이 이란과 미국의 긴장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묻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내일 테헤란으로 돌아갑니다. 국제사회와 계속 소통하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우리 이란 국민들은 변화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평화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녀의 IOC 위원 선출은 단순한 스포츠 뉴스가 아니다. 국제사회가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밀어온 하나의 흐름, 이란 사회 내부의 변화를 향한 작은 신호였다.

시아파 이슬람 체제로 굳게 닫혀 있던 나라에서 여성 선수의 글로벌 스포츠 거버넌스 참여는 겉으로 보면 스포츠의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이란 정부의 동의가 있었을 것이며, 이는 사회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쟁의 소식은 더욱 안타깝다. 전쟁은 내부 변화의 공간을 급격히 좁히는 힘을 갖고 있다. 외부의 위협이 커질수록 사회는 닫히고, 개혁의 언어는 국가 존립을 위한 안보의 언어 뒤로 밀려난다. 반정부 시위는 자취를 감추고 강경파에 대한 저항은 곧 반역으로 규정된다.


이미 그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하메네이 제거 이후 등장한 것은 체제의 완화가 아니라, 아버지보다 더 근본주의자로 알려진 아들의 세습이다. 전쟁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세습이 전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당성을 얻는다. 그렇게 내부 개혁의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역사가 반복해서 보여주듯 전쟁은 개혁의 시간을 멈추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이란의 9000만 국민은 교육 수준이 높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와 연결돼 있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상상한다.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서 만난 젊은 여성 IOC 위원은 그런 가능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국제정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보면 그 존재는 작고 미약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씨앗이 여기저기에서 자라면 결국 숲이 된다. 변화는 언제나 내부에서 시작된다. 외부 세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변화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이란은 단순히 현재의 정치 체제로만 설명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세계 문명의 깊은 뿌리를 남긴 페르시아의 후예이다. 페르시아가 인류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가운데 하나는 기원전 6세기 키루스 대왕의 키루스 실린더(Cyrus Cylinder)다. 바빌론 유대인 포로들에게 자유를 허락하고 귀환을 위한 비용까지 지급했던 키루스 대왕은 모든 민족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포용하는 통치 철학을 문자로 남겼다.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 불리는 이 기록은 관용과 공존의 질서를 제국의 원리로 세운 선언이었다.

'관용과 공존의 질서' 그것이 바로 이란과 세계가 함께 이어받아야 할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이번 전쟁의 끝이 최소한 그 유산으로 향하는 변화의 흐름마저 꺾어버리는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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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전 주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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