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신의 나무가 묻는 것
여성·이주·비주류의 시간은 왜 미술관에서 번번이 늦게 호명됐나

김윤신의 나무는 '지금'의 속도를 좀처럼 따라가지 않는다. 밖에서는 매끈한 유행이 번쩍였다 사라지고, 전시장 안에서는 그의 조각이 오래 볕을 먹은 나무의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아르헨티나의 시간 속에서 마르고 단단해진 표면, 칼이 지나간 뒤에도 그대로 남은 거친 면들. 이런 작품 앞에서 '드디어 빛을 보았다'는 말은 조금 민망해진다. 빛은 원래 거기 있었고, 한참 뒤에야 가까이 다가온 것은 보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7-88’(1987) 옆에 선 김윤신 작가. 아르헨티나 이주 4년째에 제작한 작품으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호암미술관

‘합이합일 분이분일 1987-88’(1987) 옆에 선 김윤신 작가. 아르헨티나 이주 4년째에 제작한 작품으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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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장면을 쉽게 미담으로 바꾼다. 오래 버틴 끝에 마침내 인정받았다고 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문장은 너무 빨리 따뜻해진다. 따뜻한 문장은 자주 질문을 지운다. 왜 늦었는지, 누가 그 시간을 늦췄는지, 무엇이 어떤 이름들을 오래 가장자리로 밀어 두었는지 묻지 않게 만든다. 김윤신의 재조명 앞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도 축하보다 그 질문이다.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라는 이력, 아르헨티나라는 활동의 자리, 중심에서 비껴난 채 이어 온 긴 작업의 시간. 작품은 갑자기 달라지지 않았다. 나무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고, 조각은 오래전부터 저 밀도로 서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야 한국 미술계는 그 작업을 한 원로 작가의 늦은 영예로만 읽지 않고, 자신들이 너무 늦게 읽어 온 이름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의 재조명은 찬사인 동시에 자백이다.

그 자백은 김윤신 한 사람에게서만 끝나지 않는다. 그의 나무 앞에 서 있으면 미술계가 늘 한 박자 늦게 불러온 이름들이 함께 떠오른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는 이제 너무 익숙하지만, 그 형상이 전시장 중심을 아무렇지 않게 차지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더 묘하다. 그림은 오래전에 있었는데, 미술사가 한참 뒤에야 그 앞자리를 비켜 주었다. 카르멘 에레라의 직선은 또 다르다. 너무 일찍 정확해서, 시장이 오히려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쪽에 가깝다. 셋의 사정은 다르지만 장면은 닮아 있다. 없던 작가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중심의 시야가 뒤늦게 움직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루이즈 부르주아(왼쪽 부터), 힐마 아프 클린트, 카르멘 에레라. 세 작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뒤늦은 재평가의 서사 속에 놓여 있다.

루이즈 부르주아(왼쪽 부터), 힐마 아프 클린트, 카르멘 에레라. 세 작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뒤늦은 재평가의 서사 속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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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복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미술사는 늘 새것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먼저 본문에 넣고 무엇을 오래 각주에 남겨 두는지 정하는 일에 더 가깝다. 어떤 이름은 설명 없이 중심이 되고, 어떤 이력은 늘 부연을 요구받는다. 익숙한 도시, 익숙한 제도, 익숙한 문법은 서로를 빨리 알아본다. 그 바깥에서 이어진 작업은 오래 보이지 않는다. 여성 작가, 비서구권 작가, 이주와 주변부의 시간을 통과한 작가들이 자꾸 '뒤늦게 발견되는' 이유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재평가는 아름답지만,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환영이면서 수정이다. 박수이면서 정정이다. 너무 늦게 고쳐 쓰는 미술사의 한 줄이다. '늦게라도 인정받았으니 다행'이라는 말은 다정하지만, 그 다정함은 오래된 지연에 너무 쉽게 면죄부를 준다. 전시장 안에서 더 오래 남는 것은 축하가 아니라 순서에 대한 의문이다. 왜 늘 이런 이름들은 나중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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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의 나무는 스스로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부르주아의 거미도, 클린트의 색면도, 에레라의 직선도 늦었다고 항변하지 않는다. 작품은 그저 제 시간을 버텼을 뿐이다. 전시장 벽에 새로 붙은 것은 이름표일지 몰라도, 실은 다른 것이 먼저 와 있다. 보는 쪽의 늦은 눈이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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