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몽유도원'과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무릉도원'이라는 이상향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색하는 수작이다.


무릉도원은 중국 동진 시대 시인 도연명의 산문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상향이다. 한 어부가 우연히 복숭아꽃이 흐드러진 골짜기를 따라가다 세상과 단절된 평화로운 마을 무릉도원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몽유도원은 제목 자체에 '꿈속에서 복사꽃 핀 골짜기, 곧 무릉도원을 거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화원기의 어부가 무릉도원을 다시 찾지 못했듯,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 치히로도 터널 저편의 신비한 마을을 다시 찾지 못한다. 두 작품은 결국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동일한 정서를 공유한다.


몽유도원 '한의 미학'

몽유도원은 삼국사기 열전에 전하는 도미 설화를 바탕으로 한다. 백제의 개루왕이 도미의 아내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도미의 아내를 품으려 하지만, 도미의 아내는 개루왕을 속이고 끌까지 정절을 지킨다. 분노한 개루왕이 도미의 눈을 멀게 하고. 도미의 아내는 개루왕을 피해 도미를 찾아나선다.

도미 설화는 이후 여러 문학 작품으로 재해석됐다. 월탄 박종화는 이름조차 없던 도미의 아내에게 '아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아랑의 정조'를 썼고, 최인호는 이를 다시 '몽유도원도'라는 단편으로 확장했다. 뮤지컬 몽유도원은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되, 개루왕 대신 '여경'이라는 새로운 백제 왕을 설정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On Stage]무대로 간 애니·설화…상상예술의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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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의 분노에 눈을 잃은 도미도, 그의 아내 아랑도 여경에게 어떠한 복수도 하지 않는다. 도미와 아랑은 자신들만이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을 찾아 여경에게서 최대한 멀리 달아날 뿐이다. 욕망에 사로잡힌 여경은 스스로 무너진다. 여경이 아랑에 집착하다 국정을 돌보지 못한 사이, 이웃 나라가 침공하고 결국 여경은 망국의 군주로 전락한다.


몽유도원은 도미와 아랑의 굳은 사랑을 통해, 풀리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지만 원망도, 복수도 하지 않고 인내하며 시간을 견디는 '한의 미학'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동시에 몽유도원은 서양 장르인 뮤지컬이 한국적 정서를 담아 기존의 뮤지컬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무대 미학을 보여준다.


음악에 있어서는 막이 오른 뒤 가장 먼저 들려오는 애절한 대금 소리가 관객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몽유도원에는 바이올린을 비롯한 양악기는 물론 대금, 소금, 피리, 태평소, 해금, 가야금, 장구, 북, 징, 꾕과리 등 다양한 국악기가 사용돼 절묘한 화합을 들려준다. 특히 인물의 내밀한 감정이 드러나는 중요한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국악기의 선율이 흐름을 주도한다.


무대 세트와 앙상블의 군무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역동적이면서도 절제된 군무는 마당과 들판에서 억세게 살면서도 해학을 잃지않았던 민초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장면마다 변화하며 배경의 LED를 채우는 흑백의 담백한 산수화도 장관이다. 특히 햇빛과 달빛에 비치는 윤슬은 원한에 사로잡혔을 도미와 아랑의 마음을 달래주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집념의 미학'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원작 애니메이션이 개봉한 2001년은 일본이 거품경제 붕괴 이후 10년 가까운 장기 불황을 겪던 시기였다. 작품을 제작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치히로의 아빠는 터널을 통과한 뒤 마주한 마을을 바라보며 "1990년대 초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거품경제 때문에 전부 망한 테마파크의 잔해"라고 설명한다.


미야자키는 경제적 침체 속에서도 젊은 세대가 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다.


하쿠가 치히로를 처음 만나 가마 할아범을 찾아가 무조건 일을 시켜달라고 조르라고 조언하는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을 달라고 해. 절대 포기하지 말고, 거절당해도 계속 버텨. 힘들어도 참고, 기회를 기다려." 하쿠는 치히로에게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세계를 지배하는 마녀 유바바가 동물로 만들어버린다고 위협도 한다.


치히로는 하쿠의 조언대로 일을 하며 성장하고, 낯선 세계 속에서 버텨낼 힘을 얻는다. 치히로가 터널을 통과해 만난 세계는 위험과 공포가 공존하는 낯선 세계지만 한편으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성장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공간도 되는 셈이다. 이는 오랜 불황으로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사회적으로 활력을 잃어가던 당시 일본 사회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이상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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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는 이처럼 깊이있는 사유를 담은 작품을 통해 오늘날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손으로 하는 작화 작업을 고수하는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장인으로도 추앙받는다.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작품 자체가 거장 미야자키에 대한 헌사처럼 보인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애니메이션의 장면과 흐름을 무대 위에 그대로 옮기는 '집념의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환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원작 특성상 무대화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됐던 장면들까지 집요하게 재현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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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가 용으로 변해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의 도장을 훔친 뒤 도망치다, 제니바의 마법에 걸린 종이 부적의 공격을 받으며 큰 상처를 입고, 치히로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다에서 치히로의 방으로 공간을 빠르게 이동하면서 긴박했던 순간의 긴장감을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고스란히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장면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영상 원작을 무대예술로 구현하는 방법에서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무대예술에서 구현할 수 있는 인간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질문을 남긴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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