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편의점 도시 서울, 마드리드와 파리에서 답을 찾다
먹자골목으로 변하는 재래시장
'부분적 식품사막' 삶의 질 저하
마드리드 식품 전문시장 46곳
파리 시장엔 도서관·체육관도
작년 봄, 몇몇 사람과 함께 안산도시자연공원을 산책했다. 산책을 마친 뒤 시장에 들러 막걸리를 맛있게 마셨다. 예전보다 시장 안에 음식을 파는 가게가 줄고 대신 술을 마실 수 있는 가게가 늘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시장들도 비슷하더라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부분 아파트에 살고 있고,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본다고들 했다. 그렇다 보니 시장이라기보다 '먹자골목'처럼 변화하는 건 재래시장의 생존법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다음 날, 머물고 있던 보문동 숙소 근처 한 아파트 단지 상가 슈퍼에서 가볍게 장을 봤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상가였고, 슈퍼가 깨끗하고 밝았다. 하지만 신선한 과일과 채소 종류가 사뭇 적었다. 며칠 뒤 들른 오피스텔 상가의 체인 슈퍼 역시 신선식품 종류가 적었다. 대신 라면 같은 가공식품이 많았다. 서울을 방문하는 입장이라 외식을 할 때가 많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사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부분적 식품 사막'처럼 여겨질 법했다.
'식품 사막'이란 일상적으로 식품을 살 수 있는 대형마트, 슈퍼, 식품 전문점 등이 거의 없는 지역을 뜻한다. 도시뿐만 아니라 도시 밖의 지역들이 더 많이 해당된다. 2010년 인구 감소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미국 디트로이트에 슈퍼가 워낙 적어 도시 전역이 식품 사막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식품 사막에서는 편의점 같은 작은 가게에서 가공식품 중심으로 비싸게 장을 보거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슈퍼에서 장을 볼 수밖에 없다. 2010년 말부터 상황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디트로이트는 여전히 장을 보기 어려운 도시다.
아직 서울에는 디트로이트 같은 식품 사막은 없어 보인다. 나물과 채소로 유명한 경동시장도 있고 대형마트에도 신선 식품 종류가 많다. 인구밀도가 높아서 대형마트, 슈퍼, 식당 등도 대체로 수요가 높다. 재래시장들이 먹자골목으로 변화하는 것도 서울의 잠재적 음식 수요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선진국의 다른 대도시에 비해 식품 구입 측면에서 보자면 '부분적 식품 사막'이라고 볼 수 있다. 크게 보면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아파트 단지 이외 지역에서는 대형 마트와 슈퍼를 보기 어렵다. 특히 재개발 지역은 디트로이트만큼 아니지만 장 보기가 불편하다. 예전에는 대부분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손님이 줄어들면서 거의 사라졌다. 수요가 없으니 먹자골목으로 변신도 어렵다. 예전이라면 어느 동네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던 빵집, 과일가게, 방앗간 등도 거의 다 문을 닫았다. 그나마 보문동처럼 아파트 단지에서 가까운 오래된 주택가라면 단지 상가의 대형마트와 슈퍼를 이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에서는 주로 편의점에서 식품을 구입한다. 편의점은 신선식품이 적고 가격이 더 비싸기 때문에 디트로이트와 비슷한 상황이다.
둘째, 식품 전문점이 적다. 식품 전문점이란 특정 재료 또는 식품을 파는 가게다. 사라진 동네빵집이 대표적 사례로 떠오르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예전이라면 재래시장만이 아니라 정육점, 청과물 가게, 생선 가게, 두붓집, 간장이나 참기름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거리에서 흔히 보였다. '도깨비시장'이라고 해서 미국산 땅콩버터와 잼을 파는 가게도 제법 있었다. 서로 경쟁하면서 단골손님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유지하거나 식품을 조금씩 특화했기 때문에 소비자의 선택 범위가 대형마트보다 훨씬 넓었다. 대형마트가 생기고 수입 규제가 완화하면서 이러한 전문점들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셋째, 농부들의 시장이 줄었다.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식품을 구입하던 시대에는 신선 식품은 주로 시장에서 사 먹었다. 신선한 채소·과일·생선 등을 싣고 다니는 식품 트럭도 자주 다녔다. 재래시장이 약화하고, 식품 트럭도 덜 다니면서 신선 식품을 구입하기 어려워졌다. 그 빈자리에 농부들의 시장이 들어가곤 하지만, 주로 주말에 젊은 메이커들이 번화가에서 특정 행사처럼 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쉽게 이용하기 어렵다. 그나마 이런 농부 시장은 재래시장과 식품 트럭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나마 식품 사막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서울의 식품 사막 문제 해결은 다른 선진국 대도시 여러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먼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상설시장이다. 마드리드 전역에 걸쳐 시에서 소유한 건물에 다양한 식품 전문점이 모여 있는 46개의 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시가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임대료가 저렴하고 상인들은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다. 최근 몇 개 상설시장에 타파스나 와인바가 들어와 '관광화'를 촉진할 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민들에게 필요한 식품을 공급하는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시장 활성화의 일환으로 시장 건물 안에 도서관이나 수영장, 체육관 같은 공공시설을 도입해서 고객들의 접근 빈도를 높이는 시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마드리드 면적은 서울과 거의 비슷하니, 만약 서울에 46개 공공 시장 건물이 있으면 식품 사막 문제를 거의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 파리는 건물이 아닌 순환 노천 시장 80개를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시가 장소와 상인들의 매장을 관리한다. 신선 식품 중심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고 꽃이나 생산자의 다양한 상품을 파는 곳도 있다. 규모가 큰 종합 시장도 있다. 직접 농장에서 가져온 채소와 과일을 파는 가게도 있어서 파리 시민은 이 시장을 통해 신선 식품을 손쉽게 살 수 있다. 건물 유지 관리 부담이 없어서 더 많은 시장을 열 수 있다. 만약 서울에 80개의 정기 순환 노천 시장을 운영하면 신선 식품을 구입하기 어려운 주민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울은 세계적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다른 도시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된 것은 공공의 투자 때문이다. 식품은 주민 건강과 생활의 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부디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드리드와 파리처럼 식품 시장의 다양화를 지원하는 과감한 정책을 펼쳤으면 한다. 시장도 가게도 모두 다 사라지고, 배달로 식품을 사서 먹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는 막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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