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초대형 설비 가동 지연
글로벌 공급 과잉 멈추는 효과
숨고르며 구조 개편 준비해야
"전쟁은 분명 악재다. 그러나 중동에서 추진되던 대규모 석유화학 설비의 가동이 지연된다면 우리로서는 시간을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
올해도 우리 기업들이 마주할 환경은 녹록지 않다. 중동에서 불붙은 군사적 충돌은 글로벌 에너지 가격과 물류 흐름을 흔들고 있다. 보호무역 기조는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공급망 재편도 이어지고 있다.
금리, 환율, 원자재 가격까지 불확실성이 겹겹이 쌓였다. 산업 전반의 비용 구조와 수익성이 동시에 압박을 받는 상황이다. 오랜 불황을 버텨온 정유·석유화학 업계의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수요 부진과 공급 과잉에 시달려온 상황에서 전쟁 변수까지 더해지면 체력 소모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장에서 나오는 얘기는 조금 다르다. 전쟁이 악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중동 석유화학 설비 가동이 늦어질 경우 업계에는 시간을 벌어주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의외이면서도 냉정한 시각이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그동안 가장 경계해 온 변수는 중동에서 추진 중인 초대형 석유화학 설비의 가동이었다. 중국의 대규모 증설로 이미 한 차례 가격 충격을 겪은 상황에서 중동 설비까지 본격 가동될 경우 글로벌 공급 과잉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적 긴장이 일부 프로젝트 일정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제기되자 업계에서는 그 공백을 전략을 재점검할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위기가 항상 기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위기의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산업의 다음 국면이 결정된다.
산업의 역사는 이를 여러 차례 보여줬다. 전쟁과 위기는 산업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곤 했다. 1973년 중동전쟁 이후 발생한 1차 오일쇼크는 한국 경제에도 큰 충격을 줬다.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산업 전반이 흔들렸지만 동시에 중화학 공업 육성과 정유·석유화학 산업 확대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에너지 안보와 소재 산업의 중요성이 그때 처음 산업 정책의 중심에 올라섰다.
지금 석유화학 산업이 마주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의 대규모 증설 이후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은 구조적인 공급 과잉 국면에 들어섰다. 범용 제품 가격은 장기간 압박을 받았고 국내 기업들의 수익성도 빠르게 악화됐다. 일부 기업들은 설비 가동률을 낮추거나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비핵심 사업을 정리하고 합작 구조를 재검토하는 등 산업 전반에서 체질 개선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동의 초대형 석유화학 설비까지 동시에 가동될 경우 시장의 공급 압력은 한층 더 커질 수 있다. 지금 벌어진 지정학적 충돌이 일부 프로젝트의 속도를 늦춘다면 산업에는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생길 수도 있다. 구조 개편을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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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 자체가 산업을 살려주지는 않는다. 과거에도 위기는 모든 기업에 찾아왔지만 같은 결과를 만들지는 않았다. 시간을 구조를 바꾸는 데 쓴 기업은 다음 사이클을 잡았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시장에서 밀려났다.
이제 지정학적 리스크는 이제 일시적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됐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경쟁은 산업 지형을 다시 그리고 있다. 위기는 공평하게 찾아온다. 다음 사이클의 승패는 이 위기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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