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가 100년 전 던진 교훈
연극이 일깨운 인생이란 '찰나'
추위가 혹독하던 1월 말, 며칠간 일본 도쿄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시아 각국의 전통 연극을 감상하며, 뿌리 깊은 연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하고자 노력해 왔다. 올해에는 전통 공연과 일정이 맞지 않아 일본의 현대 연극 한 편을 관람하게 됐다. 현지 기획자들의 추천으로 선택한 작품은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나이토 유코가 연출한 '체호프가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23년 3월 한일교류협회 초청으로 그의 대표 희곡 '가타부이, 1972'가 낭독 공연 형태로 소개된 바 있다.
1972년은 미군정 아래 있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해로, 유코는 한 가족의 서사를 통해 전쟁이 남긴 상흔과 반환을 앞둔 사람들의 복잡한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이번에 관람한 공연은 체호프 원작, 닐 사이먼 각색의 '체호프가 들려주는 이야기(Good Doctor)'로, 잇세이 오가타, 안도 타마에, 후쿠다 유타, 코무카이 나루, 마츠오 타카시 등이 출연했으며 도쿄예술극장 웨스트시어터에서 2026년 1월23일부터 2월2일까지 무대에 올랐다.
도쿄예술극장은 일본의 거장 건축가 아시하라 요시노부가 설계해 1990년 개관한 공간으로, 일본 연극의 본산으로 불린다. 서로 다른 구조의 4~5개 극장이 매일 다양한 레퍼토리로 관객을 맞이하고 있었고, 극장 앞 공원의 링시어터에서는 아마추어 공연팀의 댄스 경연부터 실험적인 거리극까지 폭넓은 프로그램이 이어지며 극장의 문턱을 낮추고 있었다. 그중 200석 내외 규모의 웨스트시어터는 완만한 경사의 대륙식 객석 구조로, 프로시니엄 무대에 대한 몰입도가 전반적으로 높았다.
이번 공연의 무대에는 상수에 놓인 작가의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비어 있었고, 의자와 가설물 몇 개만이 절제된 배치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 빈 무대는 공연의 흐름에 따라 효율적으로 변주되며 각 장면의 배경으로 기능했다.
나이가 지긋한 작가로 분한 노배우가 극을 열고 이끌어 가는 공연은, 최근 우리 연극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수많은 작품들에 비해 한층 담백한 호흡으로 진행됐다. 전석 1만엔의 높은 가격에도 객석은 만석이었고, 관객들은 짧은 휴식 시간에도 체호프의 원전을 넘겨보며 공연에 깊이 몰입하고 있었다.
물 흐르듯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 잔잔하면서도 깊은 심미적 만족감이 밀려왔다. 20대부터 60대로 보이는 다섯 배우가 신체와 음성을 고루 활용해 팽팽한 긴장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구현하고, 서로의 호흡을 정교하게 맞추는 모습은 연극이 결국 배우의 예술임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동일한 가격대의 객석에서 평등하게 공연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한 명의 스타가 아닌 모든 공연진에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박수로 작품에 대한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열정적인 관객 문화와 대비되는 일본 관객의 점잖은 태도는 종종 언급되는 대목이다.
대중 가수의 공연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반응일 수 있겠으나, 인생의 순간들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감정과 찰나의 어긋난 시선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않은 결말을 지켜본 관객으로서 이는 오히려 최선의 반응처럼 느껴졌다.
100년도 더 이전 안톤 체호프가 남긴 삶에 대한 통찰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삶이란 크게 노할 일도, 크게 기뻐할 일도, 혹은 크게 실망할 일도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이란에 '토마호크' 얼마나 퍼부었길래…일본에 '당...
이화원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 경계없는예술센터 대표)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