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형 선박 공급 병목현상
원유 공급망도 구조적 변화
항만 접근성·기동성 등 강점
작년 신규 발주량 48% 급증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에 밀려 한동안 비주류로 취급받던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단순한 선종 선호 변화라기보다, 초대형 선박 공급 병목과 원유 공급망의 구조적 변화, 여기에 지정학 변수까지 겹치며 중형급 선박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에즈막스(Suezmax) 급 원유 운반선. 사진은 본 기사와 직접 연관이 없음. HD한국조선해양 제공

수에즈막스(Suezmax) 급 원유 운반선. 사진은 본 기사와 직접 연관이 없음. HD한국조선해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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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운시장 분석회사 베슨노티컬의 '2025년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 신규 발주량은 74척으로 전년 50척 대비 48% 증가했다. 같은 기간 VLCC 신규 발주는 82척에서 75척으로 감소했다. 수에즈막스보다 작은 아프라막스와 파나막스급 역시 각각 59%, 71%씩 주문이 줄며 중간 크기 선종만 수요가 집중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이 같은 현상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VLCC 공급 병목이 있다. 석유수출국기구 OPEC과 비OPEC 산유국 협의체인 OPEC+가 원유 생산량을 일 평균 4170만배럴에서 지난해 4280만배럴로 늘리면서 해상 물동량은 증가했지만, 대형 조선사들의 VLCC 건조 독은 이미 3~4년치 물량으로 가득 찬 상태다. 선박이 필요한 시점과 인도 시점 사이의 간극이 커지면서, 선주들은 중형 조선사에서 건조가 가능한 수에즈막스로 눈을 돌리고 있다.

VLCC에 밀렸던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의 부활 원본보기 아이콘

수에즈막스는 12만~16만DWT 규모로 VLCC보다 적재량은 작지만, 항만 접근성과 기동성에서 강점을 가진다. VLCC는 정박을 위해 최소 수심 40m 이상의 항만이 필요하지만, 수에즈막스는 수심 20m 안팎의 항만에도 접근할 수 있다. 평균 수심이 얕은 미국 멕시코만 연안 항구들이 대표적인 활용 지역이다. 업계 관계자는 "수심이 얕은 항구에서는 VLCC 한 척 대신 소형 유조선 여러 척을 동원해야 하지만, 수에즈막스는 단일 선박으로 운송이 가능해 효율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물류상의 장점은 지정학 변수와 맞물리며 더욱 부각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원유를 둘러싼 제재 완화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해당 원유를 미국 연안으로 운송하는 데 적합한 선종으로 수에즈막스가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망을 틀어쥔 미국 지역 선주를 중심으로 수에즈막스 수요가 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선주들의 전략 변화도 이를 뒷받침한다. 세계 최대 VLCC 선단을 보유한 영국 선사 탱커스인터내셔널은 지난달 창사 이래 처음으로 수에즈막스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초대형 선박 위주의 선단 전략에서 벗어나, 지정학 리스크와 항만 제약에 대응하기 위한 선종 다변화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문제는 수요 증가 속도를 조선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1위 중형 조선사인 대한조선은 현재 수에즈막스급 선박을 신규 수주하더라도 인도 시점이 2029년 이후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선사들에 전달하고 있다.


신조선 인도 지연은 중고선 시장으로 수요를 밀어 올리고 있다. 이달 5일 기준 수에즈막스급 중고선가는 7721만달러로, 신조선가 8336만달러의 93% 수준까지 상승했다. 선령 15년차 16만DWT급 중고선 가격도 1년 사이 4243만달러에서 4557만달러로 7.4% 올랐다. 즉시 운항 가능한 선박의 희소성이 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수에즈막스의 인기가 단기간에 꺼지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전체 선대 중 20년 이상 노후 선박 비중이 약 40%에 달해 교체 수요가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데다, 향후 베네수엘라 제재 완화나 지역 분쟁에 따른 항만 제약이 이어질 경우 중형급 선박의 역할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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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미래에너지유합학과 교수는 "초대형 선박 위주의 해운 구조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중형 선종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며 "수에즈막스급 선박의 경우 파나마 운하 통과가 가능해 운송비용과 시간을 크게 절약해 아시아 국가의 에너지 안보 제고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이런 추세는 한동안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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