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 '휴민트'서 北보위성 박건 열연
행동으로 증명하는 서사에 현대적 설득력 부여
사랑 통해 '인간'의 얼굴 되찾는 과정 담아내

영화 '휴민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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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살을 에는 칼바람, 그 삭막하고 건조한 동토 위에 한 사내가 고립돼 있다. 영화 '휴민트'에서 박정민이 연기한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충실한 부속품이자, 이념으로 무장한 원칙주의자다. 류승완 감독은 견고한 그의 세계가 단 한 명의 존재로 인해 어떻게 균열이 일어나고, 끝내 붕괴하는지를 집요하게 쫓는다.


박정민은 총을 든 첩보원의 비장미보다 내면이 무너져 내릴 때의 적막에 더 공을 들였다. 빗발치는 총탄의 파열음 속에서 고요한 파문을 보여준다. 철옹성 같던 빗장을 푸는 건 과거의 연인 채선화(신세경). 박건은 자신 탓에 위태로워진 그녀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박정민은 "국가와 원칙이 전부인 사람이지만 과거 채선화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깔려있다"며 "재회 뒤 사지로 내몰리는 그녀를 목격했을 때의 참담함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벌"이라고 설명했다.

평생을 지탱해온 신념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는 붕괴 앞에서, 언어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무력함을 대신하는 정적의 결은 깊고도 서늘하다. 단순한 외로움과는 궤를 달리하는 역설적 고립이다. 타인의 부재 탓이 아니라, 지켜야 할 존재가 있기에 고독이 짙어진다. 이는 잃어버린 순수를 찾아 헤매는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박건에게 채선화는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자신을 비추는 유일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영화 '휴민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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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은 이 복잡다단한 감정의 총체를 창가에서 채선화의 노래를 듣는 장면에 응축해냈다. "촬영하면서 가장 가슴 저릿하고, 연기하기 어려웠던 순간이다. 특히 갈등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 딜레마 앞에서 느낄, 서툰 당혹감이 그랬다. 기어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발을 떼든 비극이 기다리고 있지 않나. 그 처연한 마음으로 담아내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아, 이 영화가 멜로가 될 수도 있겠구나.'"

생경한 심경의 결을 다듬는 데는 류 감독의 방대한 아카이브가 길잡이가 됐다. 촬영 전 '007 시리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첩혈쌍웅' 등 수많은 영화를 참고해달라고 요청했다. 냉철한 스파이의 이성과 누아르의 뜨거운 심장, 그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라는 무언의 주문이었다. 박정민이 가장 주목한 건 홍콩 누아르의 정서였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사내들의 서사가 박건과 많이 닮아 있었다. 당시 감성을 현대적으로 이식하는 과정이 까다로웠는데, 의외로 단순한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하나같이 변명보다, 묵묵히 싸우는 데 익숙하더라. 주윤발의 코트 자락이나 쌍권총 같은 외형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비장미를 담아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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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휴민트'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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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뺄셈의 미학은 영화에서 캐릭터 표현을 넘어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신념이 무너져 내린 사내의 텅 빈 눈동자가 요란한 총성이나 화려한 액션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 공허한 눈빛으로 박정민은 차가운 이념과 뜨거운 감정 사이, 그 위태로운 경계에 자신만의 깃발을 꽂았다. 거대한 체제의 부속품이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하려 했던 사내의 고요하고도 뜨거운 얼굴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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