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무위배' 규정 모호해 형사처벌 남용 가능성
무죄추정원칙 적용·피고인 입증책임 경감 필요

배임죄가 기업경영에 미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하고, 배임죄의 구성요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국가 간 첨단 기술 경쟁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 속에서 기업가 정신을 제고하고 신산업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선 배임죄를 비롯한 경제 형벌들이 합리적으로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0일 한국경제인협회(이하 한경협) 주최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배임죄의 모호한 규정이 형법상 죄형법정주의가 요구하는 '명확성의 원칙'과 예측 가능성을 저해한다고 짚었다. 배임죄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범죄를 의미한다.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10일 한국경제인협회 주최로 FKI타워에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10일 한국경제인협회 주최로 FKI타워에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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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 제2조에선 '신의성실의 원칙'으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을 신의에 따라 성실히 이행하도록 하고 있다. 안 교수는 배임죄 조항 내에 '임무 위배'와 같은 모호한 규정이 신의칙상의 의무 위반을 곧 범죄가 될 여지가 있는 구조로 만들어 배임죄의 성립 범위를 예측하기 어렵게 확대하고 있다고 봤다.

안 교수는 배임죄가 기업경영에 미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 가지 입법 대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 안은 경영판단원칙의 신설이다. 이익 충돌 없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합리적 결정은 배임죄의 '임무 위배'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안은 배임죄의 전면적 폐지다. 배임죄를 폐지하고 처벌이 꼭 필요한 유형만 독자적인 구성요건으로 구체화해 입법하자는 것이다. 세 번째 안은 구성요건을 정교화하는 방법이다. 일본처럼 '명백한 목적'을 추가하거나, '타인의 사무' 범위를 제한하는 등 문언을 정교하게 개정하는 방안이 거론됐다.

다만 모호성을 이유로 법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에는 신중론이 뒤따랐다. 이날 토론에 참여한 홍영기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부원장은 "타인의 '재산상 이익'을 박탈하거나 침해하는 죄는 배임죄밖에 없다"며 "법 자체를 폐지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실무 규정을 마련해서 개별 사안마다 이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영판단원칙을 배임죄의 위법성 조각 사유로 하면, 기업경영 행위에 대한 가벌성을 지금보다 크게 제한할 수 있다는 게 홍 부원장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배임 사건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도외시되고 결과 중심의 사후 평가가 이뤄지는 점도 문제로 지목됐다. 강원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인들이 업무상 배임으로 기소되면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이 나오기까지 불가피하게 자기방어에 자원과 역량을 투입하게 되는데 이는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기업의 경영판단 영역에 대한 형사 개입을 최소화하고, 무죄추정 원칙을 명확히 하는 개편을 요구했다.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왼쪽 다섯번째)와 참석자들이 10일 한국경제인협회 주최로 FKI타워에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 앞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왼쪽 다섯번째)와 참석자들이 10일 한국경제인협회 주최로 FKI타워에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 앞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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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국들은 배임죄 규정에서 한국과 차이를 보인다. 독일의 경우 미수범을 처벌하지 않으며, 업무상 배임죄나 특별배임죄 가중 규정이 없다. 일본은 고의 외에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꾀하거나,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이라는 엄격한 주관적 요건을 요구한다. 미국과 영국은 배임죄 규정 자체가 없고, 유사 조항이 있더라도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다.


류혁선 KAIST 경영공학부 교수는 "배임죄의 모호성으로 법원이 배임죄의 '임무 위배'를 소위 '기대 신뢰를 깼다'는 '신의칙 위반'으로까지 해석을 확장했다"며 "형벌권이 민사적 통제 장치를 보완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독일·일본처럼 우리나라의 배임죄도 형사책임과 민사책임의 경계를 보다 명확히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개회사를 맡은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지금은 인공지능(AI), 배터리, 바이오, 미래 모빌리티 등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나, 배임죄로 인해 기업인들이 모험적 결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기업의 경영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혁신의 원천인 기업가정신을 높이기 위해 배임죄 제도의 합리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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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칠승 더불어민주당 경제형벌·민사책임합리화TF 단장은 "경제계가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 경영판단원칙의 명확화라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이 부분은 여야, 당정 간 사실상 이견이 없다"면서 "배임죄 개편의 입법 형태가 어떻게 되든, 정상적 경영판단원칙을 배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반드시 포함될 것을 약속한다"고 화답했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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