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보기에 미국은 길을 잃었다”-엘카노 왕립연구소
“미국이 길을 잃었다. 첫째, 트럼프 행정부는 민주 정부라기보다 왕정처럼 움직이고 있다. 둘째,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의 인식과 달리, 중국이 미국과의 게임에서 이기고 있다. 셋째, 트럼프 현상은 미국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의 대연정이 추진했던 세계화와 진보 의제에 대한 반동이다. 넷째,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세계를 만들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최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전·현직 정부 고위인사와 공공·민간 부문 인사들을 만난 유럽 싱크탱크 인사의 결론이다.
스페인의 국제관계 및 전략 연구 싱크탱크인 엘카노 왕립 연구소(Elcano Royal Institute)의 미겔 오테로-이글레시아스(Miguel Otero-Iglesias) 선임연구원은 지난 6일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오테로-이글레시아스 선임연구원은 최근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가 주관하는 ‘중국을 주제로 한 대서양 횡단 대화(Transatlantic Dialogue on China)’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초청 받아 유럽의 중국 전문가 20명과 함께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들은 현직과 전직을 망라한 고위 인사들과 공공·민간 부문에서 폭넓게 의견을 교환했다. 미 상무부와 국무부, 미 의회, 미 무역대표부(USTR), 국가안보회의(NSC)는 물론 인텔, 엔비디아, 로디움그룹, JP모건 같은 기업들과도 만났다. 또 국제 관계 전문 유럽 외교관들과 언론인들, 뉴욕타임스의 토머스 프리드먼과 에드워드 웡, 워싱턴포스트의 이샨 타루어 등과도 만났다.
다음은 오테로-이글레시아스 선임연구원의 글을 번역해 정리한 것이다.
①행정부는 없다
첫째, ‘트럼프 행정부’라는 표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트럼프와 극소수의 인물들이 정부를 운영하며, 이들의 국가 관료 체계와의 연결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 결과, 백악관이 중국·유럽·러시아 등 주요 국제 이슈에 대해 명확한 전략을 갖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유럽 외교관들은 실제로 결정을 내리는 인물들에 접근하기가 극히 어렵다고 인정했고, 그나마 접촉하는 이들조차 자신들도 아는 바가 많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현실에서는 모두가 아침에 일어나 트럼프의 트루스 소셜 계정을 확인하며 사태의 향방을 가늠한다. 일부는 트럼프 가족과의 연결고리를 통해 ‘이너 서클’에 접근하려 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고까지 고백했다. 이는 핵심 정보 접근의 부재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미국이 점점 자유민주주의보다 걸프 왕정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도 이중으로 우려스럽다.
이 상황은 여러 부정적 결과를 낳지만, 외교적으로 가장 즉각적인 문제는 유럽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든 중대한 사안이 발생하면, 먼저 워싱턴의 생각과 의도를 파악한 뒤 대응하는 것이 첫 단계였다. 이제는 그게 불가능해졌고, 이는 방향 상실과 방치감을 낳고 있다. 이미 힘이 약화된 ‘늙은 유럽’에게, 미국이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행동을 고민하는 일은 안전망 없는 줄타기와 같다. 특히 한 노련한 국제 기자의 표현대로 세계 최강대국이 ‘두바이식’으로 운영되는 노골적인 kleptocracy(권력자가 국가 자원을 가로채는 정치 체제)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인식이 퍼질수록 공포는 커진다.
②중국이 이기고 있다
둘째는, MAGA 진영의 인식과 달리 실제로는 중국이 미국과의 게임에서 이기고 있다는 점이다. MAGA식 요약은 이렇다. 관세 덕분에 트럼프는 시진핑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고 양보를 받아냈다. 대표적으로 중국은 최근 협정에서 약속한 대두의 80%를 이미 구매했다. 이들은 중국이 희토류를 무기로 꺼내 들며 미국이 피할 수 없는 병목을 드러냈다는 점도 인정하지만, 바로 그래서 일시적 휴전이 성립됐다고 본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의 말처럼, 12~18개월 내 미국은 핵심 광물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출 것이며, 그때 다시 공세로 돌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MAGA 진영은 중국의 희토류 카드 사용 자체가 긍정적이라고 본다. 중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이를 사용함으로써 약탈적 본성을 드러냈고, 그 결과 유럽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희토류뿐 아니라 통신·AI(인공지능) 등 다른 분야에서도 베이징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는 워싱턴에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보다 독립적인 관료·분석가, 특히 민간 부문에서는 해석이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경쟁에서 지고 있으며, 이는 지난 1년간 분명해졌다. 트럼프가 중국을 굴복시키려고 145% 관세를 부과했을 때, 행정부로 온 전화가 엄청 많았다. 포드 같은 대기업뿐 아니라, 중국산 투입재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한 중견·가족기업들까지 전 산업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특정 중국산 원단을 대체할 수 없는 매트리스 제조업체의 사례는 절박함을 잘 보여준다.
현실은 중국이 희토류로 미국 경제를 조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설령 그 의존을 줄인다 해도(민간에서는 5년 이내 달성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일본도 15년이 지났으나 아직 자립하지 못했다), 중국은 다른 병목-예컨대 항생제의 기초 활성 의약품 원료(API)-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는 공중보건에 직격탄이 되는 더 강력한 무기다.
대두에서도 미국의 실익은 제한적이다. 중국은 2025년 1200만톤, 2028년까지 매년 2500만톤 구매를 약속했지만, 2020~2024년 연평균 구매량은 2900만톤이었다. 코로나 이후 중국은 브라질 대두 구매를 늘리며 미국 의존도를 크게 낮췄다.
첨단기술에서도 중국의 힘은 분명하다. 트럼프 1기부터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수출 통제로 반도체에서 중국의 진전을 늦추려 했지만, 결과는 미흡하거나 역효과였다. 업계의 공감대는 분명하다. 중국에 팔지 않으면 매출을 잃고, 더 나쁜 것은 중국의 첨단 설계·제조 역량을 오히려 가속시킨다는 점이다. 화웨이와 SMIC는 반도체에 수억유로를 투자 중이며 격차는 꾸준히 좁혀지고, 개방형 AI 모델 덕분에 중국이 유리해질 가능성도 있다. 한 관계자의 말처럼 “경쟁자보다 앞서려면 중국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트럼프가 엔비디아의 H200 대중 수출을 허용하되 ‘몫’을 요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의 역설은 이것이다. 유럽과 미국 모두 내부 문제로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부족한 반면, 중국은 반대다. 부동산 거품 붕괴, 부채, 고령화, 소비 부진 같은 심각한 내부 문제가 오히려 산업·기술에 대한 집중을 강화해 대외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2025년 1조2000억 달러의 무역흑자가 이를 보여준다. 2030년경 중국의 글로벌 제조 비중은 약 45%에 이를 전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부가 약할수록 외부는 강해진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트럼프 하에서 미국의 재산업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③반동적 장악
트럼프와 MAGA가 대전략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워싱턴에서의 대화로 보건대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이 전략은 이념적·물질적 두 축을 갖는다.
이념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명확한 거부다. 트럼프 1기와 함께 일했던 인사의 설명에 따르면, MAGA의 시각에서 지난 40년간(빌 클린턴 이후) 미국·캐나다·영국·EU 등의 정치적·공적 공간은 ‘(신)리버럴 단일당’이 지배해 왔다. 미국에서 ‘리버럴’은 좌파를 뜻한다.
즉, 중도우파(공화당)와 중도좌파(민주당)의 대연정이 세계화와 진보 의제를 추진해 왔다는 인식이다. 이는 ‘워크니스(wokeness, 깨어있음)’의 당으로도 묘사된다. 데이비드 굿하트(‘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의 저자)의 구분을 빌리면 ‘어디서나 살 수 있는(anywheres)’ 엘리트 대 ‘어디에 뿌리내린(somewheres)’ 토착적 애국자의 대결이다. MAGA의 목표는 이 단일당을 해체하고 전통 가치에 기반한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다. “반동이 권력을 장악한다”가 슬로건이 될 수 있다. 새 국가안보전략은 그 방향을 촉구한다.
물질적 측면도 있다. 중국과 경쟁하려면 더 큰 스케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이는 새 국방전략에 명시돼 있다. 그래서 그린란드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남아메리카 남단의 군도)까지, 영국과 EU를 포함한 서반구 전체를 워싱턴이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린란드 논의는 당연히 가장 민감한 문제다. 관계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린란드는 미국 소유가 돼야 한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방어하는 데 단호했다. NATO의 분열 가능성을 제기하자, 대서양 양측의 군사·상업·투자·인적·가치의 결속이 너무 강해 깨지지 않을 것이라며 일축했다. 권력분립·시민권·언론자유·국제법·주권에 대한 가치의 차이를 지적하자, 관점의 차이일 뿐 같은 가치를 지킨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린란드와 서반구 전체를 자국 안보 공간으로 규정해 이념과 물질을 결합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바이든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유럽과의 대중 협상이 실질 성과를 내지 못한 데 대한 좌절을 공개적으로 표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해석은 유럽이 중국의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복된 노력에도 정렬(공동전선 형성)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일본과의 5G·화웨이 논의는 3주였는데, 독일과는 24개월이 걸렸다는 비교도 나왔다.
우리 중 일부는 일본이 중국 위협을 훨씬 강하게 인식하는 점에서 비교가 적절치 않다고 반박했다. 또한 유럽(혹은 유럽 국가들)에는 자율성이 있으며, 대서양 대화는 미국의 강요·유럽의 복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중국을 패권 경쟁 상대로 보는 미국과 달리, 유럽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관점 차이도 분명했다. 이는 관계자들을 불쾌하게 했고, 그 결과 트럼프 행정부가 대화·조정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이는 트럼프의 거친 태도를 정당화한다.
④중국 없는 세계
글로벌 사우스(Plural South)는 논의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고, 언급될 때도 주로 유럽 쪽에서였다. 미국 쪽에서는 인도가 언급됐지만, 다면적 플레이를 하는 신뢰하기 어려운 국가이자 중국 가치사슬에 깊이 통합됐다는 평가였다. 가장 인상적인 반응은 미 의회에서 나왔다. “우리 유럽은 미국이 유럽 국가들의 중국 기술과 제품 구매를 원치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오늘날 많은 중국 산업재·기술은 유럽과 동등하거나 더 낫고 더 싸다. 그래서 Plural South와 유럽 일부가 이를 구매하는 것은 정상”이라는 주장에 대해, 답은 이랬다. “그럴 수 있지만 매우 근시안적이다. 언젠가 그들은 중국이 독재국가이며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권위주의가 늘고, 유럽 시각에서 미 민주주의의 견고함에 의문이 커지는 시점에서 흥미로운 반응이다.
중국을 배제한 세계를 만들려는 의지는 더 나아간다. 백악관 무역 관련 보좌관은 WTO는 시장경제를 위해 설계됐지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므로 미국에겐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수년간 중국과 협상했지만 변화시키지 못한 데 대한 좌절도 표했다. 이제 워싱턴에서는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보좌관은 트럼프 1기에는 무역적자 축소(1단계), 중국 경제에서 정부 역할 축소(2단계)를 목표로 했지만, 지금은 순수한 거래주의라고 했다. 중국은 더 많이 사야 하고, 미국은 더 많이 팔아야 하며, 중국은 미국에 위협이 될 방식으로 발전해선 안 된다.
이 논리에서 트럼프의 우선순위는 무역, 무역, 무역, 그리고 억지다. 동맹-유럽·일본·한국-이 미국 제품을 더 사고, 국방비를 더 쓰며,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정렬하길 원한다. 관세라는 망치를 사용해 일본부터 유럽까지 관세·비관세 장벽을 낮추고 국방비를 늘리게 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는 1단계인 글로벌 무역 재균형이며, 2단계(차기 임기 가능성)는 중국 없는 새로운 글로벌 무역기구 제안이라는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산업 역량에 의해 자국 산업이 위협받는 걸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참가자들은 놀람과 불신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2위 경제, PPP(구매력 평가) 기준 세계 최대 경제, 글로벌 제조의 약 30%(곧 40~45%)를 차지하는 나라를 배제한 무역기구는 환상이라는 지적이다. 전반적 인식은 워싱턴이 길을 잃었다는 것. 다만 이는 MAGA의 자기 확신을 반영하기도 한다.
결론: 드라기와 카니 사이에서
중국과 미국의 지도부 모두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고 믿고, 이는 세계를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더 가깝게 만든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원인을 공포가 아니라 양측의 오만-“우리 체제, 우리 나라가 우월하다”-에서 찾았다. 이것이 MAGA의 믿음이며, 미국의 변화를 지켜보는 베이징에서도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이는 매우 위험하다. 어느 쪽이든 상대에게 굴욕감을 주는 행동이 대결을 촉발할 수 있고, 내부 약점을 가리기 위해 대립을 격화하는 선택으로 치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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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시진핑은 올해 최대 네 차례 만날 수 있다. 결과는 지켜봐야 한다. EU는 드라기 플랜(유럽의 대규모 투자와 산업 전략 전면 개편을 핵심으로 하는 EU 경쟁력 강화 방안)의 실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카니 독트린(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종말에 대응해 중견국들이 독자적인 생존 전략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노선)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양대 강국의 압박은 올해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겔 오테로-이글레시아스(Miguel Otero-Iglesia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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