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에 핀 잿빛 누아르…류승완, 붉은 피 대신 '고독'을 흩뿌리다[슬레이트]
'휴민트' 스펙터클 너머 응시한 고독한 얼굴들
멜빌의 냉기와 오우삼의 열기 결합한 수작
비극적 운명 박제한 '프리즈 프레임'의 미학
입김조차 허락하지 않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혹한. 그 서늘한 백지 위에 류승완 감독은 붉은 피 대신 잿빛 고독을 흩뿌린다. 신작 '휴민트'는 익히 봐왔던, 욕망과 배신으로 질척이는 할리우드식 첩보물이 아니다. 장 피에르 멜빌의 고독을 껴입은 채, 오우삼의 총구를 겨누는 사내들의 건조한 진혼곡이다.
영화의 배경과 공기, 인물의 태도와 호흡 등은 1950~70년대 프렌치 누아르의 영토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다. 직업적 윤리와 신의가 지배하는, 차갑고도 건조한 침묵의 세계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서늘한 대지 위에 오우삼의 홍콩 누아르가 품었던 뜨거운 비장미가 덧입혀졌다는 사실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역설적인 무대 위에서 고독한 늑대들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뼈대는 각자의 원칙을 지키려다 벼랑 끝에 몰린 자들의 선택이다. 국정원 블랙 요원인 조 과장(조인성)은 과거 정보원을 잃으면서 더는 사람을 도구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관리 대상인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를 어떻게든 지키려 한다.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의 딜레마는 더 가혹하다. 영사관 내 인신매매를 수사하라는 임무를 원칙대로 수행하려다, 도리어 조직의 치부를 건드린다.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이 자신의 비리를 덮기 위해 박건은 물론 그의 옛 연인 채선화까지 사지로 몰아넣는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소중한 사람을 겨누는 칼날로 돌아온 것이다.
멜빌의 침묵으로 쌓고, 오우삼의 의리로 맺다
영화의 톤 앤 매너는 멜빌의 걸작 '한밤의 암살자(1967)'나 '암흑가의 세 사람(1970)'을 지배하던 청회색의 질감과 맞닿아 있다. 서늘한 색채가 건조한 눈빛, 정제된 움직임 등과 어우러져 깊은 내면의 풍경을 빚어낸다. 인물들은 이념을 토론하는 대신 묵묵히 총기를 점검하고, 매서운 바람 속에서 옷깃을 여미며, 차가운 보드카를 들이켠다. 류승완 감독은 이러한 직업적 루틴을 건조하게 나열함으로써, 시스템 속에 갇힌 개인의 고독을 침묵으로 형상화한다.
이 정적을 깨트리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적을 향한 뜨거운 연민이다. 적대적 진영임에도 서로에게서 거울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 두 남자의 구도는 홍콩 누아르, 특히 오우삼의 '첩혈쌍웅(1989)'을 명징하게 소환한다. 전문 킬러인 아장(주윤발)과 그를 쫓던 형사 이응(이수현)이 제니(엽천문)를 위해 의기투합했듯, 조 과장과 박건 역시 채선화라는 인간적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연대한다. 국적이나 사상이 아닌, 타락한 세상에서 원칙을 지키려는 상대를 향한 의리가 이념의 빈자리를 채운다.
폐쇄성에 갇힌 얼굴, 프리즈 프레임으로 박제하다
이 고전적 서사를 담아내는 시각적 연출 또한 주제와 긴밀히 맞물린다. 류 감독은 인물을 둘러싼 광활한 배경을 과감히 지우고, 그들의 표정과 호흡에 앵글을 집중시킨다. 특히 조 과장과 박건이 딜레마 앞에서 침묵할 때, 카메라는 그들의 미세한 근육 떨림과 흔들리는 동공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 덕에 관객은 탁 트인 대로변 등을 보면서도, 마치 탈출구 없는 독방에 갇힌 듯한 인물의 심리적 폐쇄성을 실감할 수 있다.
고뇌하는 얼굴들은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 기법을 만나 정점을 찍는다. 인물이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내리는 찰나, 영화가 흐르던 시간을 툭 끊어내듯 화면을 정지시키고 디졸브(Dissolve)를 덧입혀 찰나의 감정을 긴 여운으로 확장한다. 움직임을 소거한 자리에는 비극적 운명만이 앙상하게 남는다. 그 어떤 역동적인 액션보다 묵직한 진실을 웅변하며, 관객의 마음을 멈춰선 시간 속에 묶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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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선 끝에 남는 것은 총성보다 뜨거운 침묵, 폭발보다 격렬한 클로즈업이다. 직업적 신념 대 탐욕이라는 보편적인 누아르 문법 위에서, 뺄셈의 미학과 시각적 폐쇄성을 만나 시리도록 차가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이 삭막한 무대의 여백은 오롯이 배우들의 에너지로 채워진다. 시스템의 부속품이기를 거부하고 기어이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치열한 얼굴들. 화약 연기가 걷힌 자리에 끝내 남는 것은, 바로 그 묵직한 사람의 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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