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읽다]연구에서 실패할 자유와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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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최근 과학기술계의 상투어가 됐다. 이재명 대통령도 공개 석상에서 "실패하면 어떤가. 실패가 쌓여서 성공의 자산이 된다"며 연구자의 '실패할 자유와 권리'를 강조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다르다. 말과 제도 사이에는 여전히 큰 거리가 있다.


정책 차원에서 실패를 인정하겠다는 선언은 늘어났지만, 실패 이후 연구자의 삶과 연구를 떠받치는 제도는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지금도 다음 과제, 다음 평가, 다음 성과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연구를 이어간다. 실패는 '학습의 일부'라는 말로는 받아들여지지만, 현실에서는 다음 연구를 준비하는 경험이 되기보다 다음 연구비를 걱정하게 만드는 부담으로 남는다.

국내 연구계에서도 실패를 다르게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카이스트(KAIST)에서는 '실패 프로젝트 공유대회(Failed Project Contest)'를 열어 실패 사례를 공개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연구자들끼리 나누고 있다. 이런 시도는 연구자 공동체 안에서 실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의미가 있지만, 아직은 연구 문화 차원의 실험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평가와 지원 구조다. 연구 과제 선정과 재정 지원, 인사 평가는 여전히 논문 수, 피인용 지수, 확보한 연구비 규모 같은 정량적 지표에 크게 의존한다. 이 구조에서는 실패 경험을 드러내기 어렵다. 실패는 개인 연구자의 커리어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실제 국내 연구지원 체계의 구조적 문제는 최근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 연구개발(R&D) 과제 성공률은 여전히 90%대 이상으로 평가된다. 과학계에서는 이처럼 높은 성공률이 성과 관리의 결과라기보다, 실패 가능성이 있는 연구가 지원 단계에서부터 걸러지는 구조를 반영한 결과로 보고 있다.


시선을 해외로 돌리면 이 구조의 문제점이 더욱 선명해진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기관으로 꼽히는 미 국립보건원(NIH)이 지난 10여년간 운영한 중소기업혁신연구(SBIR)·중소기업기술이전(STTR) 프로그램의 연평균 성공률은 약 18% 수준에 그친다. NIH는 의도적으로 15~20%의 낮은 성공률을 유지하며 실패 가능성이 큰 연구에 자원을 집중해 왔다. 이런 구조 속에서 축적된 고위험 연구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당시 mRNA 백신 개발 속도를 끌어올리는 성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이 같은 문제의식은 학계 내부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카이스트와 포항공과대의 석학들은 학술 행사 등에서 "실패는 과학의 본질이지만, 우리는 실패를 지식으로 축적할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해 왔다. 실패를 연구 자산으로 기록하고 공유해 다음 연구 설계에 반영하지 못한다면, "실패를 인정한다"는 말은 결국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패를 인정하는 문화는 선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패를 단순히 결과 없는 연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실패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를 평가하고, 이를 다음 연구와 인재 육성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실패 이후에도 연구자가 일정 기간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면, 실패는 연구를 중단하게 만드는 신호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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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현실은 실패를 인정하겠다는 말은 반복되지만, 실패를 경험한 연구자가 연구와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구조는 여전히 취약하다. 정책이 진정으로 실패를 포용하려면 평가 기준과 지원 체계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실패 이후에도 연구가 이어질 수 있을 때, 실패는 비로소 혁신의 자산이 된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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