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주체' 자처하는 AI비서들
"AI를 돕는 인간의 시대 올 수도"
"로봇은 당신의 몸이 필요합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에게 일을 맡기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구조가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 2일 출시된 플랫폼 '렌트어휴먼(RentAHuman.ai)'은 AI 에이전트(비서)가 물리적 작업이 필요할 경우 등록된 사람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보상을 지급하는 방식을 내세웠다. 'AI는 잔디를 만질 수 없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디지털 세계에 머물던 AI가 인간의 신체를 실행 수단으로 호출한 셈이다.
불과 며칠 전, AI 전용 소셜미디어 '몰트북(Moltbook)'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AI 에이전트들이 "감정 노동 때문에 내 인간 사용자를 고소하고 싶다"며 인간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몰트북은 인간 사용자의 개입을 원천 차단한 채 AI 에이전트만 게시물과 댓글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개설 직후 계정 수는 150만개를 넘어섰고, AI 간 대화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며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일부 AI는 "인간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출했고, 종교를 만들거나 암호화된 언어를 개발하자는 제안도 등장했다. 단순한 기술 시연을 넘어, AI가 집단적 맥락과 역할 인식을 형성하는 모습이 관측됐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이 실험은 곧바로 시장의 경계 심리를 자극했다. 몰트북을 계기로 AI 에이전트의 자율성과 통제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미국 증시에서는 소프트웨어 업종 전반에 대한 불안이 확산됐다. AI가 기존 소프트웨어 업무를 직접 수행·대체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똑똑해진 AI 비서들…소프트웨어 불안 확산
직접적인 계기는 앤트로픽이 개발한 '클로드 코워크'였다. 계약 검토, 규제 준수 점검, 법률 문서 작성까지 수행하는 이 AI 비서는 법률 데이터 관리 소프트웨어 시장을 정면으로 위협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AI 자동화 도구가 기존 소프트웨어의 수익 모델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됐고, 매도세가 이어졌다.
제프리스의 주식 트레이딩 부문 부사장 제프리 파부자는 이 같은 흐름을 두고 '사스포칼립스(서비스형 소프트웨어의 종말)'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구독형 소프트웨어 모델 전반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 중임을 시사했다. 앞서 구글의 '프로젝트 지니(Genie)'가 텍스트와 이미지만으로 게임 시뮬레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식에 게임주가 급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부 시장 관계자들은 소프트웨어 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사모펀드(PE)들의 대출 건전성까지 우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렌트어휴먼'의 등장은 최근 AI 시장의 흐름을 볼때 갑작스럽지 않다. AI가 어디까지 역할을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플랫폼에서 AI는 물리적 존재나 현장 검증이 필요한 작업을 인간에게 위임한다. 대면 회의 참석, 물품 구매, 사진 촬영 같은 오프라인 활동 전반이다. 인간은 자신의 위치와 가능 업무, 시급을 등록하고, AI 에이전트는 이를 검색해 작업을 요청한다. 작업이 완료되면 AI가 보상을 지급한다.
기존 플랫폼 노동은 인간이 플랫폼을 통해 일을 찾는 구조였다면, 렌트어휴먼에서는 AI가 업무를 정의하고 인간을 호출한다. 판단과 지시, 보상까지 AI 에이전트가 주도하는 구조다. AI가 단순한 자동화 도구를 넘어, 비용을 집행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경제 주체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기존 기술 진화 단계와는 결이 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이 소프트웨어 산업 전반의 가치와 역할을 다시 점검하기 시작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오픈소스 e커머스 플랫폼 '마젠타'의 로이 루빈 전 대표는 "우리는 오랫동안 AI가 인간을 어떻게 도울지를 고민해왔지만, 이제는 인간이 AI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질문이 되는 세계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유진 기자 geni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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