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설탕·밀가루 가격 인하 '눈 가리고 아웅'
조선후기 소설 '허생전' 등장한 매점매석
처벌 수위 낮아 수백년째 이어져
공정위 제재 앞두고 밀가루·설탕값 인하 '찔끔'
조선 후기 박지원의 풍자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은 제사 과일·말총 등을 매점매석해 10배 넘는 폭리를 취했다. 하지만 허생은 처벌받지 않았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대판 매점매석인 '담합'이 수십 년째 이어졌지만, 여전히 처벌 수위는 낮다. '꼬리 자르기' 식으로 담합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했던 전·현직 임직원들이 경미한 법적 책임을 졌고, 회사(법인)는 담합으로 얻은 이익보다 훨씬 적은 과징금 처분만 받고 사건이 종료되면서 매점매석이 근절되지 않는 것이다.
'민생침해범죄'로 규정된 담합을 자행한 제분·제당 업체들은 대기업·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모두 짬짜미에 나서 부당 이득을 챙겼다. 밀가루 업계 1위인 대한제분이 담합 기간 영업이익이 3배 넘게 불어났고, 꼴찌인 한탑은 100억원의 영업적자를 벗어나 5년 만에 37억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지난 5년간 이들이 배를 채우는 동안 필수 식료품인 밀가루와 설탕을 구매한 서민들의 주머니는 턱없이 가벼워졌다. 이들이 담합을 하던 기간(2020년 1월~ 지난해 10월)에 밀가루 가격은 최고 42%까지 올라갔고, 이 시기 밀가루 소비자 지수는 36%까지 상승했다. 설탕 가격은 담합 발생 전 대비 최고 66%까지 치솟았다.
대통령이 엄중 처벌하겠다는 한마디와 검찰 수사,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까지 악재가 거듭되자 대한제분은 지난 1일부터 '곰표' 밀가루 주요 가격을 평균 4.6% 내렸다. CJ 제일제당은 지난달 초 업소용 설탕·밀가루 가격을 각각 평균 6%·4% 인하한 데 이어 전날에는 소비자용 설탕·밀가루 전 제품 가격을 평균 5% 내렸다. 지난해 말까지 밀가루 수입 가격이 t당 200달러대였다가 올해 들어 100달러 대로 하락한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하는 모양새다.
현대판 매점매석은 쉽게 척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선 담합에 가담하는 임직원들에 대한 처벌 수위가 너무 경미하다. 담합에 가담한 개인에 대해 징역 10년 이하에 형을 선고할 수 있는 미국 등과 달리 우리나라는 담합으로 인한 공정거래법 위반 범죄의 법정형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삼전·하닉에 결혼자금 3억 몰빵한 공무원…"살아...
담합행위에 대한 엄격한 처벌의 필요성을 학계나 업계에서도 주장하고 있으나, 개정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솜방망이 처벌이 계속되면서 기업이나 소속 임직원들이 담합에 대한 경각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담합을 처벌하는 법의 잣대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수많은 허생이 계속해서 호시탐탐 서민의 주머니를 노릴 것이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