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길 산책]소설의 고독에서 북적이는 현실로
이야기의 가치 줄어드는 시대
AI가 할 수 없는 인간의 경험
쓰고 들려주는 존재로 남기를
"식사 중에 신문을 읽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음식을 먹든지, 소설을 읽든지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철학자 발터 베냐민이 쓴 '이야기꾼 에세이'에 나오는 문장이다. 과연 그렇다. 20대 시절 소설 1000권 이상을 읽었지만, 밥을 먹으면서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자취생 시절, 자주 혼자 밥을 먹었지만 그럴 때면 주로 영상을 봤다. 가벼운 만화나 시트콤 같은 걸 보는 게 좋았다. 그러나 소설을 읽은 기억은 없다.
베냐민에 따르면, 소설 읽기는 '먹어 치우기'다. 소설 읽기는 단순한 감정 이입하기가 아니라 섭취에 탐닉하기다. 독자는 그냥 주인공 입장이 되어보는 게 아니라 주인공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먹어 치운다. 그렇게 마치 날것의 음식처럼 독자는 그것을 흡수하고 소화한다. 독자는 소설의 주인공과 합성된다. 일종의 키메라가 된다.
이런 설명은, 20대 내내 내가 왜 그렇게 소설에 빠져들었고 또 30대가 돼서는 소설에서 빠져나왔는지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20대에 나는 주로 청년이 주인공인 소설들을 쌓아놓고 읽었는데, 내가 마치 그들인 것처럼 느끼곤 했다. 헤세나 폴 오스터, 도스토옙스키나 셀린저가 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소설 속 주인공들을 먹어 치워서 그들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런 상태로부터 조금씩 멀어졌다. 오히려 나는 소설 속 무언가보다 내 삶, 내 현실, 내 눈앞에 생생하게 존재하는 이 삶의 경험을 더 깊이 들이마시는 데 관심을 갖게 됐다. 그래서 나의 글쓰기도 매일 내가 경험한 이 삶을 녹여내는 일이 됐다. 고독하게 어떤 나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섞여 들어가는 경험을 갈망했다. 사랑과 육아, 취업과 독립 가운데서 이어진 치열한 여정들, 그 현실 자체가 나의 글이 됐다.
내 기준에서 삶은 묘하게 소설의 반대편에 있었다. 베냐민은 소설이 '고독한 개인' 속에서 탄생한다고 말한다. 남들이 결코 닿을 수도 없는 곳에, 남들에게 조언을 건넬 수도 없는 곳에 소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남들 속으로, 남들과 조언을 주고받는 세계로, 이 삶의 쓸모 안으로, 고독보다는 눈부시게 부딪히며 나뒹구는 현실로 섞여들고 싶었다. 매일 더 그렇게 삶 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게 '소설을 먹어 치우는 일'도 점점 하지 않게 됐다.
베냐민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경험을 경험으로 건네며, 조언과 쓸모를 말하며, 지혜를 나누는 존재들은 이제 사멸했다고 한다. 대신 남은 건 고독한 개인들이 저마다의 세계에 몰입하는 소설이다. 나는 소설의 고독을 분명 사랑한다. 그렇지만 내가 되고 싶은 건 사실 나의 고독에 침잠하는 소설가가 아니라 사람들 속을 거닐며 쓸모 있는 경험을 말하는 이야기꾼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쓰는 글들 역시 바로 그런 이야기였으면 한다는 사실도.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여러모로 인간이 하는 이야기의 가치는 줄어든다고 말하는 시대다. 그렇지만, AI가 할 수 없는 인간의 경험에서 피어오르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매일 글을 쓰고,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다. 나는 우리 시대 '인간 이야기꾼'으로 남길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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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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