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소더버그 신작 '프레젠스'
1인칭 시점으로 가족의 은밀한 균열 조명
무력함 극대화하는 동시에 감정의 깊이 체험

영화 '프레젠스' 스틸 컷

영화 '프레젠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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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에게는 발이 없다. 그저 부유할 뿐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신작 '프레젠스'는 이 명제를 기이한 영화적 체험으로 치환한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땅을 밟지 않은 채 유령의 시점으로 집안을 미끄러지듯 유영한다. 그 시선이 머무는 곳엔, 이사 온 가족의 은밀한 균열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는 교외의 한적한 주택으로 이사 온 가족의 일상을 비추며 출발한다. 겉보기엔 평온해 보이지만, 구성원 간 결속력은 이미 금이 가 있다. 특히 막내딸 클로이(칼리나 리앙)는 단짝 나디아를 잃은 상실감에 빠져 집안의 조그만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소더버그 감독은 이 지점에서 영리한 서술 트릭을 사용한다. 클로이는 유령을 나디아라고 믿으며, 유령 또한 공포의 대상이 아닌 상처받은 소녀를 위로하는 수호천사처럼 묘사된다. 관객이 유령의 시선에 동화돼 안심하는 순간, 영화는 스크린 중앙에 진짜 공포를 세운다.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적 방관이다.


엄마 리베카(루시 리우)는 완벽주의자로 포장돼 있지만, 실상은 금융 범죄를 저지르고 수사망을 피해 도망친 불안한 도피자다. 그는 친구를 잃어 힘겨워하는 딸의 호소를 관심을 끌려는 연기로 치부한다. 딸이 미워서가 아니다. 자신의 범죄가 드러날까 두려워 집안의 어떤 소란도 용납하지 않는, 이기적인 생존 본능 때문이다.

영화 '프레젠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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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가족들도 공범에 가깝다. 아빠 크리스(크리스 설리반)는 아내의 강압적인 통제에 주눅 들어 침묵을 택한다. 오빠 타일러(에디 머데이) 역시 동생의 절박한 호소를 귀찮은 사춘기의 투정으로 치부하며 방문을 닫아버린다.


한 식탁에 둘러앉아도 이들의 마음은 각기 다른 곳을 부유한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서로를 보호해야 할 가족이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민낯. 여기서 뿜어나오는 냉기는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혼이 건네는 온기를 더욱 선명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백미는 유령의 정체와 그 안에 담긴 서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유령을 포함한 인물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밝혀지면서 영화가 전혀 다른 질감의 드라마로 변모한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고스트 스토리(2017)'가 상실을 관조하는 정적인 슬픔을 그렸다면, '프레젠스'는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시공간마저 뒤트는 간절함을 이야기한다. 단순한 공포 장치인 줄 알았던 1인칭 시점이, 실은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절박하고 애달픈 사랑의 시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 '프레젠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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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더버그 감독이 택한 1인칭 시점 샷은 단순한 기교가 아니다. 광각 렌즈로 왜곡된 화면은 유령이 느끼는 혼란을 시각화하고, 컷 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눈앞에서 가족이 무너져도 개입할 수 없는 무력함을 극대화한다. 관객은 유령의 눈을 빌려 이 답답함을 공유하며, 역설적으로 그 존재가 품은 감정의 깊이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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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소리를 나누며 산다고 해서 모두가 가족은 아니다. 반대로 육신이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끝난 뒤 찾아오는 먹먹함은 바로 이 모순에서 기인한다. 살아서 철저히 부재(Absence)했던 가족과 죽어서야 비로소 증명된 존재(Presence). 소더버그가 던진 이 서늘한 질문은 어떤 귀신보다 더 오래도록, 그리고 끈질기게 관객의 뒤를 밟는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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