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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으로써 살려냈다"…유해진이 완성한 가장 처연한 '구원'[라임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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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서 엄흥도 연기
이익 좇던 촌부서 비극의 성인이 되기까지
"그저 진실하게만 표현하자고 생각"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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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의 얼굴은 늘 장르를 규정짓는 이정표였다. 입매가 올라가면 코미디, 미간이 좁혀지면 스릴러가 됐다. 다음 달 4일 개봉하는 '왕과 사는 남자'에서 이 익숙한 도식은 지워졌다. 역사의 격랑 앞에 선 한 인간의 처연한 민얼굴을 드러낸다. 강원도 영월의 산골 마을 촌장 엄흥도다. 유배객을 유치해 부흥한 이웃 마을을 목격하고, 같은 방식으로 팔자를 고쳐보려 한다. 그러나 얄궂게도 첫 손님은 복권 가능성이 전무한 폐주(廢主) 단종(박지훈)이다.


이해타산적이던 엄흥도가 소년의 보호자로 변모하는 과정은 점층적이다. 거창한 대의명분은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마주 앉아 밥술을 뜨고, 무심하게 강물을 바라보는 소소한 일상이 쌓여 떼려야 뗄 수 없는 '정(情)'으로 치환된다. 유해진은 초중반까지 특유의 능청스러운 생활 연기로 관객을 무장해제 시킨다. 이는 역설적으로 후반부의 비극을 극대화하는 치밀한 복선이 된다.

유해진은 일련의 과정을 '스며듦'으로 정의했다. 그는 "낯선 타인으로 대하던 얼굴이 나도 모르게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표정으로 바뀌더라"며 "그 감정 변화의 그래프가 촘촘히 쌓여야 후반부의 비극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후반부에 대해서는 "마음 깊이 들어온 사람의 마지막을 감당해야 하는데, 어떻게 머리로 계산하고 연기할 수 있겠느냐"며 "그저 진실하게만 표현하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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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다하겠다는 다짐은 촬영 당일, 처절한 침묵으로 이어졌다. 유해진은 이별 시퀀스를 앞두고 박지훈과 눈도 마주칠 수 없어 피해 다녔다. 그는 "평소대로라면 농담을 건네며 반갑게 맞이했을 텐데, 그날은 얼굴을 보면 감정이 미리 터져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외면했다"고 밝혔다.


인사조차 나누기 버거울 정도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던 그 날의 침묵은, 스크린 속 엄흥도의 떨리는 눈빛이 연기가 아닌 배우가 감내한 실제 통증이었음을 방증한다. 평소 철저하게 대사를 입에 붙이고 준비하는 '노력파'지만, 이 장면에서만큼은 기술적인 구상을 내려놓고 오직 감정에 몸을 맡겼다. 장항준 감독은 "두세 번의 테이크 만에 오케이 사인이 났을 정도로, 그 순간의 에너지는 날것 그대로였다"고 부연했다.

유해진은 이번 작품을 통해 역사 속에 단 한 줄로만 기록된 엄흥도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는 "단종의 비극은 알고 있었지만, 그 곁에 이런 분이 계셨다는 건 처음 알았다"며 "이렇게 인간적인 온기를 지닌 인물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소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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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이 스크린 위로 복원해 낸 이 따스함은 관객을 향한 당부로 이어진다. 그는 "요즘 세상이 삭막하다고들 하지만, 마음속에는 누구나 뜨거운 정이 있다고 믿는다"며 "이번 작품이 가까이 있는 분들을 한 번쯤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효율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사람 냄새'를 믿는 이 바람은, 엄흥도가 단종에게 건넸던 마지막 위로와 많이 닮았다. 가벼운 셈을 하던 손끝으로 가장 무거운 죽음을 받아내고, 익숙한 웃음기를 지운 자리에 처연한 슬픔을 채워 넣었다. 희극과 비극을 오가며 쌓아 올린 유해진의 주름 깊은 얼굴은, 이제 단순한 배우의 마스크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이자 역사가 됐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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