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 60% 규모 '5000억달러' 부담
'윈윈' 주장 대만 정부, 내용은 은폐
핵심 반도체 이전, 안보 명분도 한계
미 헐리우드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지루하고 따분한 작품 중 하나였다. 최근 대만이 미국과 체결한 최신 관세 합의 소식을 접하며 필자는 가학적 주종관계가 주요 테마인 이 블록버스터를 다시 떠올리게 됐다.
이번 합의는 '협정'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대만의 전면적인 항복에 가깝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끄는 백악관을 향해 대만이 "감사합니다. 주인님"이라고 말해야 하는 처지와 다를 바 없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과 집권 민주진보당(DPP)이 이끄는 대만 정부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자기파괴적 정치(political sadomasochism)'와 같은 별도의 개념이 필요해 보일 정도다. 대만 정부의 선택은 기존 국제관계 이론만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정리쥔 대만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은 이번 합의를 '윈윈'이라고 평가하며 이는 대만의 양보가 아니라 미국 내 투자 확대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대만 기업의 해외 투자 기반을 넓히는 동시에, 미국의 대만 투자를 유도하는 조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대만에 새롭게 약속한 구체적인 투자나 보장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합의에 따르면 미국은 대만산 제품의 관세를 기존 20%에서 15%로 낮추고 제네릭 의약품과 그 원료, 항공기 부품, 일부 천연자원에는 무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대신 대만기업들은 미국 내 반도체, 에너지, 인공지능(AI) 생산 능력 확대를 위해 총 2500억달러(약335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TSMC가 지난해 이미 약속한 1000억달러 투자가 포함돼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추가 투자도 이어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만 반도체 산업의 핵심 기업인 TSMC는 트럼프 대통령의 1·2기 행정부를 거치며 2020년 이후 총 165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이에 따라 TSMC는 미국에 최소 6개의 반도체 생산 공장과 2개의 패키징 시설, 대규모 연구개발(R&D) 센터를 추가로 건설해야 한다. 대만 정부도 미국에 추가 투자를 추진하는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최소 2500억달러 규모의 신용보증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모두 합치면 대만이 사실상 떠안게 되는 대미 관련 부담액은 총 5000억달러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되돌리기 어려운 약속이다. 대만 야당인 국민당의 뉴쉬팅 대변인은 설령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조치가 미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히더라도 대만은 미국에 대한 투자 약속을 그대로 이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관세 인하를 원한다면 대만이 자국 반도체 제조 산업의 절반을 미국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압박했는데, 당시 대만 협상단을 이끌던 정 부원장은 반도체 생산을 미국과 50대 50로 나누는 방안은 현실적으로 이행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40~50%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결과로 귀결된다. 계산 방식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미국의 요구와 합의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러트닉 장관은 이에 대해 보다 노골적으로 설명했다. 그가 말한대로라면 애초 미국의 목표는 대만 반도체 공급망과 생산의 최소 40%를 미국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는 만약 반도체가 미국 내에서 생산되지 않을 경우 관세율이 최대 100%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대만이 부담하게 된 5000억달러는 대만 국내총생산(GDP)의 약 60%에 달한다. 똑같이 15% 관세를 적용받는 일본과 한국의 대미 투자 규모와 비교하면 대만의 부담이 얼마나 과도한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미국과 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일본과 한국은 미국에 각각 5500억달러와 35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GDP 대비 비율로 환산하면 일본은 약 12%, 한국은 18%에 그친다.
이와 관련 우종셴 국민당 문화 홍보위원회 위원장은 일본·한국의 사례와 비교하기 위해 이번 협상의 세부 내용을 보다 명확히 공개할 것을 요구해왔다. 특히 GDP 부담 비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 위원장은 이번 대미 합의가 일방적이라며, 미국이 15% 관세율을 미끼로 대만이 어디까지 양보할지를 시험한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협상 내용의 세부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은 채 중요한 사항들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 위원장은 또 고부가가치 산업 다수를 미국으로 이전하는 데 동의할 경우 대만의 산업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대만 내 양질의 일자리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뉴쉬팅 대변인도 협상을 통해 얻어낸 관세율이 과연 대만에 유리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번 합의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의 미국 이전을 앞당기고, 나아가 산업 공급망 전체의 탈(脫)대만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라이칭더 총통과 집권당인 민진당이 눈앞의 통상 위기를 넘기기 위해 대만의 첨단 산업 미래를 담보로 내놓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대만의 안보를 위해 미국의 요구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대만이 핵심 산업인 반도체의 절반을 내주고 산업의 미래까지 담보로 잡힌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지 묻고 싶다.
정 부원장은 이번 관세·투자 합의를 통해 대만이 AI 분야에서 미국의 가까운 전략적 파트너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 본토와의 관계 개선에 드는 비용과 비교하면 이번 선택이 훨씬 덜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민진당과 분리주의 성향의 세력들이 중국과 협력하기보다는 미국에 매달리는 길을 택했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미국의 궁극적인 노림수일지도 모른다. 대만의 핵심산업 기반을 미국으로 최대한 옮겨온 뒤 중국이 대만을 되찾는 상황이 오더라도 주요 산업과 부가가치는 이미 빠져나간 상태가 되도록 하는 구상 말이다. 결국 미국의 '그레이씨'는 흡족해하고, 대만의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말하게 됐다. "고맙습니다, 미국."
알렉스 로 SCMP 칼럼니스트
이 글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칼럼 Taiwan has just sold out TSMC and half its chips industry to the US를 아시아경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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