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집안 무게를 혼자 견디는 사람"…이순재가 남긴 이 시대 '어른'의 의미
'대발이 아버지'부터 '야동순재'까지
시대마다 다른 얼굴 보여줘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
드라마 속 아버지는 많지만 '아버지상' 자체를 만들어낸 배우는 흔치 않다. 25일 새벽 별세한 이순재 씨는 그 부류에 속했다. 1956년 데뷔 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아버지의 얼굴'을 제시했다.
1990년대 초반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이씨의 아버지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대발이 아버지'는 고집스럽고 목소리가 큰 전형적 가부장이었다. 시청자가 이 인물을 미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호함 속에서 드러난 책임감 때문이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가장은 억세 보여도 집안의 무게를 혼자 견디는 사람"이라고 했다. 불합리한 가정 질서가 유지되던 시대, 그 안에서 가족을 지키려는 인물의 복잡한 속내를 현실감 있게 표현했다. 사실상 '아버지의 양면성'을 시청자에게 처음 각인시켰다.
2006년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이씨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야동 순재'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는 권위의 갑옷을 벗어놓은 노년 남성이었다. 까칠하고 잔소리 많은 노인 같다가도 아내 앞에서는 서툴고 손주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졌다.
이씨는 "노년은 단단함과 허술함이 공존하는 시기"라며 캐릭터를 현실의 아버지들과 겹쳐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시청자는 처음으로 '불완전한 아버지'에 공감했고, 그는 시대가 변하면 아버지도 변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80대 후반까지 완주한 연극 '리어왕'은 이씨의 연기 철학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30회 넘게 단독으로 무대에 서며 3시간 가까운 공연 내내 대사와 감정선을 유지했다.
그는 "자다가도 대사가 튀어나오도록 석 달 전부터 통째로 외웠다"고 말했다. 87세 배우가 이 대사량을 암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후배들에게는 충격이었고, 공연계 관계자들은 "기본기와 근면, 책임으로 버틴 마지막 세대의 배우"라고 평가했다. 이들의 회고는 이씨가 왜 '어른'이었는지 설명해준다.
그는 무대 밖에서도 어른의 책임을 잃지 않았다. 드라마 '개소리'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연우 씨는 지난해 시상식에서 "이순재 선생님께서 손녀처럼 챙겨주셨다"며 울먹였다. 촬영 중 틈만 나면 발성과 대사, 현장 매너를 조언했고, 그 과정에서 꾸짖을 땐 단호했지만 끝내 등을 두드려주곤 했다고 한다.
배우 김용건 씨는 이 작품 제작발표회에서 이씨가 촬영 도중 건강 이상이 있었음에도 "스태프가 준비한 날은 배우가 맞춰야 한다"면서 자리를 지켰다고 밝혔다. 그는 "현장의 누구보다 먼저 오고 마지막에 나가는 선배였다"고 했다.
후배들은 공통으로 "권위를 부리기보다 먼저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이씨를 회고했다. 가르침은 말보다 행동을 통해 주어졌고, 그 방식이 '아버지 같은 선배'라는 인상을 만들었다.
그는 2008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관객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공연을 미룰 수 없다고 했다. 관객을 배우에게 시간을 내주는 존재로 여기며 "그 시간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남겼다.
이씨는 동료 배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예술인 복지제도 홍보대사로 활동할 당시 "연극 무대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한 구조"라며 "후배들이 연기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버지가 자녀 세대의 길을 닦아주듯 후배 세대의 자리를 만들려는 태도였다.
철학과 출신답게 그는 연기를 '언어와 사고의 작업'으로 이해했다. "배우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그의 연기론의 핵심이었다.
이씨는 매번 캐릭터를 분석하면서 현실과 맞지 않는 설정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가난한 인물이 비싼 옷을 입는 드라마는 시청자를 속이는 일"이라고 비판했고, "말맛과 언어의 호흡이 연기의 절반"이라며 우리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배우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이씨가 만든 아버지상은 한 가지 특질 위에 세워져 있다. 권위가 아니라 책임에서 출발하는 아버지,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치는 어른, 기본기로 버티는 장인이라는 점이다.
'대발이 아버지'의 강한 책임, '야동 순재'의 유머와 허술함, '리어왕'의 비극적 존엄은 서로 다른 얼굴처럼 보이지만 모두 '어른으로서 자신을 다스리려는 사람'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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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 당일, 뮤지컬 배우 테이는 "선생님은 끝까지 무대에서 살다 가고 싶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연기와 삶은 결국 이런 문장으로 귀결된다.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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