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오버 더 모빌리티](38)
'부불3대' 속설 깬 현대家 3세대 경영
시대 정신에 맞는 리더십 전환이 핵심
정주영, 창업주 개척자 리더십…공동체 중심
정몽구, 품질로 내실 다져…위기 때 승부수
정의선, 경쟁사와도 협력 '개방형 혁신'
'브랜딩 시대' 내다보고 제네시스 성공 안착
청운동 자택에서 현대 일가가 가족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왼쪽 뒷줄부터) 정몽구 명예회장, 정성이 이노션 고문, 정명이 현대커머셜 사장, 정윤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고문, 정의선 회장, 정 명예회장의 배우자 이정화 여사. (앞줄 왼쪽부터) 故 변중석 여사, 아산 정주영 선대회장.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한다. 중국의 '부불삼대(富不三代)', 일본의 '3대째가 집안을 망친다(三代目は家を潰す)', 영어권의 '셔츠 차림으로 시작해 3대 만에 도로 셔츠 차림으로(Shirtsleeves to shirtsleeves in three generations)' 등 표현은 모두 같은 통찰을 담고 있다. 세대를 거쳐 창업자의 개척정신은 희미해지고, 상속된 부와 권한이 되레 리더의 동기와 위기관리 능력을 약화시킨다고 우려한 것은 세계 공통인 셈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사에서 '3대 징크스'를 비켜간 사례가 있는데 바로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정주영-정몽구-정의선으로 이어진 3세대 경영은 생존을 넘어 자산 규모와 사업 영역 확장, 글로벌 위상 강화에 성공했다. 특히 현대가(家)의 3대(代) 리더십은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에 맞춰 진화해온 것이 특징이다.
전후(戰後) 산업 기반을 닦아야 했던 정주영 시대는 '개척'과 '도전'이 핵심이었다. 산업 기반이 없던 종전 한국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강한 추진력이 필요했다. 정몽구 시대에는 해외 시장에 본격 데뷔하며 글로벌 품질 경쟁이 본격화됐다. 장인정신을 강조하고 집요한 리더십으로 내실을 다지며 현대차를 선진국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과감한 해외 투자도 이 시기에 빛을 발했다.
현재 정의선 시대는 '연결'과 '소통'이 중심이다. 완성차 제조를 넘어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지혜를 엮어내는 통합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세계 1위'를 바라보는 지금은 혁신의 속도를 높이고, 외부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개방형 혁신도 필요하다. 이번 연재에서는 세 리더의 경영 철학과 조직 운영 방식, 시대적 과제 등을 통해 현대차그룹의 리더십 변화를 구조적 관점에서 짚어본다.
정주영, 개척자의 실행력과 공동체 리더십
정주영 선대회장의 창업가 정신은 현실을 개척하는 '도전의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전후 대한민국은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다. "해봤어?"라는 한마디로 압축되는 그의 정신은 가진 것 없는 한국인들도 한번 도전해 보라는 응원의 메시지와 같았다. 그는 계산보다 실행이 앞섰고, 완벽한 준비보다 먼저 부딪히며 답을 찾는 쪽을 택했다.
외화자금 한 푼 없던 시절 '조선소 모형 사진' 한 장으로 영국 은행을 설득해 차관을 얻어낸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보통 업체들이 5년 넘게 걸리는 어려운 프로젝트를 선박 건조 경험도 없던 현대중공업이 2년 3개월 만에 해낸 것은 그의 창의적인 사고방식 덕분이었다. 조선소를 먼저 짓고 선박을 건조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는 조선소와 선박을 동시에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는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이 고정관념이며, 이것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함정"이라고 말했다.
정 선대회장이 한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흙수저 신화' 그의 이야기가 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 시대의 희망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집념과 실행력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누구나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는 산업 불모지에서 성장한 한국 경제의 궤적과도 겹친다. 김기찬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는 "기업가와 사업가의 차이는 새로운 기회 포착 능력에서 나뉜다"며 "정주영은 중동 건설업, 조선업 등 모두가 불가능하다 여겼던 시장에서 기회를 찾은 도전적인 기업가"라고 평가했다.
정주영의 리더십은 개척자의 추진력에서 시작됐지만, 그 뿌리에는 늘 '사람'과 '공동체'가 있었다. 가난한 농가에서 자라 청년 시절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하동 정(鄭)'씨라는 본관 외에 집안 내력조차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재계 1위에 오르자 전국의 하동 정씨 공파가 "정 회장은 우리 공파 사람"이라며 다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그는 "출신이 어디든 같은 정씨면 다 한가족이지, 뭘 그렇게 따지오?"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광화문 현대해상 빌딩 한편에 모든 문중 사람들을 위한 사랑방을 내주고, 직원까지 두어 집안 행사를 챙기게 했다. 이 일화는 단순한 미담이 아니라,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정 선대회장은 인재를 중용할 때도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일할 의지와 책임감이 있으면 누구든 '한가족'으로 품었다.
그에게 '가족'은 혈연보다 넓은 개념이었다. 같은 산업에 몸담은 노동자, 같은 시대를 사는 국민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였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경영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정 선대회장은 산업을 일으키는 일을 곧 나라를 세우는 일로 여겼다.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다. 자동차를 자력 생산·수출할 수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 덕분에 해외에서 다른 상품도 함께 높이 평가받는다. 자동차 생산이 100% 국산화된다면 우리 기계공업 전체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몽구의 품질 경영과 역발상의 승부
자동차로 국가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창업자의 열망은 장남 정몽구로 이어졌다. 정 명예회장은 그룹 내에서 그 누구보다 자동차를 잘 아는 '현장형 경영자'였다. 이러한 정 명예회장의 리더십은 한국 자동차 산업이 '개척'에서 '정밀화·고도화'의 단계로 넘어가던 시기와 정확히 맞물렸다.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세심함과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경영 스타일에 고스란히 투영됐다. 경복고 동창인 신달석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 전 이사장은 "그는 학창 시절부터 공부든 운동이든 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며 "치열한 경쟁심이 훗날 현대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 경쟁에 나설 때도 그대로 드러났다"고 회고했다.
정 명예회장은 취임 직후 품질 혁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경쟁 상대로 가장 먼저 지목된 기업은 도요타였다. 그는 양재동 본사 1층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품질상황실을 설치하고, 미국 신차품질조사기관 J.D.파워가 지적한 개선 과제를 적어 액자로 걸어두게 했다. 누구나 오가며 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품질 선언문'이었다. 품질상황실은 24시간 가동됐고, 모든 임직원이 소비자 불만 관련 보고서를 확인해야 했다. 보고서를 읽지 않은 임원에게는 회장의 질책이 쏟아졌다.
정몽구에게 품질에서 실수는 곧 신뢰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조직엔 항상 긴장감이 흘렀다. 당시 글로벌 시장에서 품질에 대해 낮은 평가를 받았던 현대차로선, 장인정신을 강조한 품질에 대한 집착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승부수를 던졌다. 대표적 사례가 미국 시장에서 단행한 '10년·10만마일' 무상보증 정책이다. 당시 내부에서는 막대한 리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반대가 적지 않았다. 그는 "그럼 10년 이상 고장나지 않을 차를 만들면 되지 않냐"며 단호히 밀어붙였다. 품질에서만큼은 물러설 수 없다는 신념이었다. 한 번의 과감한 선택이 조직을 일깨웠고, 품질 제일주의가 뿌리내리는 기점이 됐다. 결국 품질경영 선언 5년 만인 2004년, 현대차는 J.D.파워 평가에서 도요타를 제쳤다. 이는 현대차가 '가성비' 이미지를 벗고 신뢰도 있는 품질 브랜드로서 처음 인정받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정몽구 리더십의 또다른 핵심축은 '역발상 사고'다. 다른 기업이 주저할 때 그는 반대로 움직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기아차 인수가 대표적이다. 국내 경제가 침체됐고 자동차 수요는 물론 소비심리 전반이 얼어붙었다. 시장에서는 "지금 기아를 떠안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의 판단은 달랐다. 기아 브랜드가 더해지면 현대차그룹이 내수 시장을 확고히 장악하고, 해외 확장에서도 보다 큰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봤다. 이후 기아차는 혹독한 체질 개선을 거쳐 1년 만에 정상궤도에 올라섰고, 현대차그룹은 단숨에 국내 최대 자동차 그룹으로 도약했다.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를 중심으로 한 해외 공략도 마찬가지였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1990년대 러시아는 정치·경제 불안으로 다국적 기업이 진출을 꺼리던 시장이다. 그는 "어려울 때 먼저 들어가야 기회가 온다"며 일찌감치 수출을 시작하고 현지 공장 건설을 밀어붙였다. 결과적으로 훗날 현대차는 러시아에서 점유율 20%를 장악하며 브랜드 순위 2위까지 올랐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정치적인 이슈로 철수했지만, 러시아는 현대차의 글로벌 확장 역사에서 상징적 무대로 남았다.
정의선, 소통의 리더십…미래차 생태계 연결
정의선 회장의 리더십은 소통, 연결이 핵심을 이룬다. 군대식 위계질서가 뿌리깊게 박혀있던 조직문화에 가장 먼저 손을 댔다. 그가 수석부회장에 오른 직후 △복장 자율화 △근무시간 유연제 △보고 간소화 △수평적 직급체계 등 변화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초기 반응은 조심스러움 그 자체였다. 과연 "정말 청바지를 입고 출근해도 되나"라며 타부서의 분위기를 살피는 일이 막내들의 역할이었다. 그만큼 위계와 규율이 뿌리 깊었던 현대차 조직 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현대차에서 자율복장은 더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다. 대면 보고도 줄고, 이메일 보고가 일상화됐다. 보고 체계가 단순해지자 의사 결정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김 교수는 "정 회장과 이메일로 의견을 주고받을 때 보면 답변이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며 "리더의 신속한 피드백은 조직 전체에 속도감을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정의선의 '연결'은 조직 내부를 넘어 외부로 확장된다. 단순한 오너가 아닌, 글로벌 기술·산업 생태계를 조율하는 '비즈니스 외교관'의 역할이다. 정 회장은 메리 바라 GM 회장,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 회장 등 글로벌 완성차 수장들과 직접 교류한다. 경쟁사와도 손잡는 개방형 리더십이다. 톱티어 경쟁자와 교류하며 공급망 생태계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과 5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의 '치맥 회동' 역시 같은 맥락이다. 특히 국내 재계에서는 "자동차를 둘러싼 삼성과 현대차의 과거 경쟁 관계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정 회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인사들은 그를 '겸손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자세가 아니다.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태도다. 그는 선대회장과 함께 일했던 원로들을 찾아가 "할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라고 의견을 구하곤 한다. 명예회장과 함께 근무하던 시절에도 그는 아버지의 해외 공식 일정에 동행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공식석상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이 부각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단순한 선배 경영자를 넘어서 예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가족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현대가(家). (사진 왼쪽부터) 故 변중석 여사, 아산 정주영 선대회장과 손자 정의선 회장,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원본보기 아이콘그런 그가 단 한 번,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강하게 밀어붙인 순간이 있었다. 바로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의 독립 론칭이다. 당시 아버지 정 명예회장은 대규모 투자와 장기전이 요구되는 프리미엄 전략에 신중했다. 어설프게 준비한다면 '비싼 현대차'라는 인식에 갇히면서 두 브랜드 모두 타격을 입게 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 정 회장은 "기술과 품질은 이미 준비됐습니다.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면, 우리도 이제 고급화 전략을 펼 때가 됐습니다"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정 회장의 시선은 미래로 향한다. 기술과 품질의 시대를 넘어 브랜딩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현대차가 '가성비' 이미지를 벗고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디자인과 스토리, 감성이 더해져야 했다. 루크 동커볼케 등 글로벌 무대에서 디자인으로 인정받은 인재를 영입하고 브랜드 철학을 다시 세웠다. 제네시스는 여백·절제·조용한 자신감 등 한국적 미감이 깃든 정체성을 강조했다. 제네시스를 현대차 내 고급 라인으로 둘지 독립시킬지를 두고 논쟁이 있었지만, 정 회장은 차별화된 고객 경험을 위해 독립 브랜드를 선택했다. 2015년 출범한 제네시스는 북미 J.D.파워 프리미엄 부문 최상위 평가를 받고, 8년 만에 글로벌 누적 판매 100만대를 달성했다. 한국 브랜드 최초로 글로벌 프리미엄 시장에 안착했다고 인정받고 있다.
우수연 기자 yes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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