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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공들인 고급기술, 빼앗기는 건 한순간[中企 기술탈취의 늪]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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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수년 공들인 고급기술, 빼앗기는 건 한순간

계약 체결 후 '영업상 필요' 이유로 자료 요구
다른 협력사에 넘기고 계약 해지 통보

주로 납품·협력 과정에서 기술탈취 발생
계약 엎어질까 봐 불공정함 묵인하는 경우도

중소기업 연간 기술침해 299건
탈취 수법 교묘해 매년 피해액 급증

편집자주기술을 빼앗긴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은 이겨도 져도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승소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도 어렵거니와, 가까스로 통과하더라도 손해배상액이 터무니없이 적어 사업을 접는 일이 부지기수다. '기술을 빼앗겼다면 운이 없었던 걸로 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는 불문율은 그래서 생겨났다. 아무리 잘 싸워도 이기기 어렵고, 이겨도 지는 것과 다름없는 이런 싸움이 연간 300건 정도 벌어진다. 아시아경제는 총 5회에 걸쳐 중소기업을 파탄으로 내모는 기술탈취의 현황과 원인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한다.

김태일 퀀텀 대표는 2018년, 4년간 공들여 개발한 자사 기술을 A사에 송두리째 빼앗겼다. 누에고치를 이용한 천연 실크 마스크 제조 기술로, 그동안 국내에서 시도되지 않아 업계에서 촉망받던 기술이었다. 김 대표가 기술 개발을 위해 한국과 태국을 오가며 투자한 금액은 5억원 남짓. 중소기업 자금 사정으론 빠듯한 수준이었지만, 김 대표는 '기술에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김태일 퀀텀 대표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서희 기자

김태일 퀀텀 대표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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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손꼽히는 마스크팩 제조사였던 A사는 중소기업 입장에선 거부하기 힘든 공급 조건을 제시하며 김 대표에게 접근했다. 퀀텀은 곧바로 A사와 독점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생산 공장도 1000평으로 확대했다. 1년 뒤 A사는 '중국 수출을 위해 생산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며 퀀텀에 기술 자료 일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김 대표가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며 거부하자 A사는 "영업 못 해서 주문을 못 받으면 어떡할 거냐"라며 타박했다. 결국 김 대표는 총 3번에 걸쳐 제조 기술이 담긴 서류 전문과 동영상 수십 개를 전송했다. 김 대표는 "사업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거절할 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2018년 11월, A사는 퀀텀으로부터 받은 기술 자료 전문을 또 다른 협력사인 B사에 넘기고 퀀텀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A사는 김 대표가 공유한 자료로 관련 특허까지 출원했다. 김 대표는 회사를 운영하며 4년 넘게 민·형사 소송에 매달렸으나 재판부는 A사의 특허 출원은 불법이라고 보면서도 이로 인한 퀀텀의 손해 여부는 증명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김 대표는 금전적·정신적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지난해 결국 폐업했다. 김 대표는 24일 지난 시간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털어놨다. "해주고 싶은 말은, 소송을 아예 시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재수 없게 기술 뺏겼네' 하고 말았으면 좋겠어요. 절대 이길 수가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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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상 필요하단 말에 덥석…"

김 대표와 퀀텀의 사례는 우리 중소기업들이 기술탈취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무리 공을 많이 들여 좋은 기술을 개발해낸다고 해도 판로나 영업망을 확보하지 않으면 빛을 볼 수 없고, 이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덩치가 더 큰 동종 기업이나 잠재적 경쟁 기업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것이다.


대기업은 혁신 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을 눈여겨보다 해당 기업에 납품 또는 협력을 제안하고, 정식 계약이 체결되면 '영업상 필요하다'는 등의 명목으로 기술 자료를 공유할 것을 요구한다. 정식 계약이 체결되기 전인 교섭 과정에서부터 기술이 유출되는 경우도 있다. 협력을 이유로 만남을 제안한 대기업이 중소기업과의 논의 과정에서 나온 사업상 기술 콘셉트 등을 추후에 그대로 사용하는 식이다. 중소기업이 기술 유출 사실을 인지했을 땐 이미 권리를 주장하기 늦어져 버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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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과정은 엄격한 '갑을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회사의 '돈줄'을 쥐고 있는 대기업의 요구에 중소기업이 반대할 여력은 크지 않다. 이상 징후는 계약 단계에서 이미 포착되는 경우가 많음에도 눈을 감는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이 기술 유출과 관련한 세부적인 내용까지 계약서에 포함하려다, 자칫 계약이 체결되기도 전에 거래가 엎어질 수 있어서다.

법률 지식이 부족해 계약서의 세부 내용까지 이해하지 못한 채 덥석 서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문 법무팀을 대동한 대기업이 알게 모르게 계약서에 불공정한 내용을 포함해도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다.


배수영 법무법인 파트원 변호사는 "계약이 불공정함을 알면서도 여기에 서명하는 중소기업 대표들이 많다"며 "어차피 요구 사항이 관철되기 어렵다는 걸 알뿐더러, 지나치게 내세우다 계약이 불발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상생협력법에 따라 기본적인 비밀유지조항은 포함하게 돼 있지만, 법률 지식이 부족한 중소기업 입장에서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살피는 건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피해액 평균 25억원…"탈취 방식 계속 교묘해져"

이런 환경 속에서 중소기업의 기술 탈취 피해 사례는 매년 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2024 기술보호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연간 기술침해 건수는 약 299건에 달했다. 해마다 기술 탈취 유형이 교묘해지면서 피해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기술 탈취로 인한 중소기업 평균 피해액은 2022년 12억3000만원, 2023년 14억9000만원, 2024년 24억8000만원으로 매년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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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하는 기업은 '거래(37.5%)' 혹은 '경쟁(37.5%)' 관계에 있는 기업이 많았다. 그럼에도 피해기업의 대다수는 '거부할 수 있었지만, 지속적 거래 관계로 인해 거부하기 어려웠다'거나 '거부할 수 있었지만, 미래 사업 확장을 고려해 감수'했다는 응답이 60%로 많았다.


한 기술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예전엔 완성된 기술을 빼앗는 방식이었다면 요즘은 공동 개발이란 명목으로 아이디어 단계부터 대기업이 접근해 데이터를 요구하고 빼돌리는 방식도 빈번하다"며 "해마다 탈취 유형이 다양해지고 방식이 교묘해지면서 건당 평균 피해 금액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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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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