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넘게 방위 로드맵 회의만 지속
예산안 둘러싸고 각국 간 불만 누적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최근 '방위 대비 태세 로드맵 2030'이란 유럽 방위계획을 발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다음 해인 2023년부터 논의를 시작했는데, 거의 3년 가까이 지나서야 방위계획안이 수립된 것이다. 주요 골자는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한 드론 방벽을 구축하고 현재 20% 미만인 무기 공동구매 비율을 2027년까지 40%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하지만 실제 실행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단 이번 방위계획을 발표하면서 신규 예산 합의에 실패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편성한 유럽안보행동(SAFE) 대출 프로그램 1500억유로(약 249조원)만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드론 방벽이나 무기 공동구매를 위한 추가 예산은 전혀 배정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개별 회원국들의 국방예산 증액분 중에서 편성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어느 나라가 추가 비용을 부담할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합의 사안이 없다.
실제 방위계획을 둘러싼 유럽 내 갈등은 더욱 복잡하다.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 지난달 러시아 드론의 국경 침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여전히 남유럽 대부분 국가는 드론 방벽 설치에 반대하고 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 등은 드론 방벽이 결국 러시아와 인접한 동유럽 국가들에만 집중적으로 건설될 것이며, 이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왕 만들 거면 동서 관계없이 똑같이 모든 나라에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바로 다음 타깃이 동유럽 국가들인 만큼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 30년 넘게 유럽 안보를 지탱했던 미국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다가오고 있다. 미국을 대신해 방위전략을 이끌어갈 주도국가가 없다 보니 국가 간 갈등이 좀처럼 조율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가 핵우산을 제공하고,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했음에도 이들 국가는 구심점이 될 수 없는 상태다.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군비확장을 주장 중인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며 내각 붕괴가 거듭되고 있고, 독일은 징병제 부활 가능성을 타진하자마자 연립 정부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또한 유럽이 안보 홀로서기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도 드러났다. 바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인 병참 수송문제다. 그동안 유럽의 군대, 군수물자 수송은 유럽 내 미군기지 간의 수송로를 통해 대부분 움직여왔다. 유럽 내에서는 군용철도나 도로를 따로 보유한 국가도 프랑스와 독일밖에 없다. 유사시 민간철도, 차들을 모두 통제하고 각국의 국경을 통과해 동유럽까지 이동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막대한 비용을 들여 유럽을 횡단할 수 있는 거대한 군사 철도망과 도로망 건설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러한 새로운 비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EU가 올해부터 2030년까지 5년간 편성한 전체 유럽 방위계획 예산인 8000억유로(약 1328조원)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란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수십 년간 미국에 의존해 온 방위전략에 대한 치밀한 고민 없이 말만 앞섰던 자강안보가 얼마나 큰 대가로 다가왔는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유럽의 지지부진한 방위계획 상황은 북·중·러의 군사적 위협을 바라보고 서 있는 한국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자강안보라는 말 자체는 매우 쉽지만, 실제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방안이나 예산을 편성하는 일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자강안보가 단순히 정치인들의 구호로만 머문다면 결국 탁상공론에만 그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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