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시작되면 한국 사회는 묘한 착잡함과 열등감에 휩싸인다. '왜 우리는 이번에도 과학상을 받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분석과 사설이 쏟아지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발' 역량은 갖췄지만 지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발견'의 리듬을 아직 충분히 체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노벨상은 즉시성과 거리가 멀다. 대개 연구 발견 후 20~30년이 지나서야 수상의 영광이 돌아온다. 긴 축적과 검증의 시간이 전제된다는 뜻이다. 일본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메이지 유신(1868) 이후 80년 만인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첫 과학상을 품었고, 21세기에 접어들어 수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일본이 배출한 27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 중 22명이 2000년대 이후에 나왔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과학기술력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발견의 서사'가 연쇄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도 광복 이후 80년 가까운 '축적의 시간'을 걸어왔다.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첨단 공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 바로 이 축적의 결과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축적의 힘을 노벨상이 주목하는 '발견'으로 연결하는 설계와 실행일 것이다.
'개발의 나라'에서 '발견의 나라'로 도약하려면 세 톱니가 동시에 맞물려야 한다. 먼저 연구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바로 세워야 한다. 장기·고위험 탐색적 기초연구의 비중을 과감히 키우고 산업 현장의 난제를 기초과학의 질문으로 전환하는 연결고리를 강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평가와 인센티브의 철학을 속도·분량 중심에서 질·영향 중심으로 전환하고 연구자에게 충분한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실패를 용인하고 재도전의 기회를 제도화할 때 비로소 큰 도전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예산의 지속성을 담보해야 한다. 대형 장비나 장기 연구는 한 번 중단되면 복구가 어렵다. 최소 3~5년의 가시성과 10년 단위 장기 프로그램의 안정적 지원이 뒷받침될 때 연구자는 두려움 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깊이 있는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창성의 정신을 소환해야 한다. 유행을 좇는 얕은 모방 연구를 경계하고, 기존의 상식과 방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념과 틀을 세우는 데서 과학의 진보는 시작된다. '안전한 모방'이 아닌 '위험을 감수하는 창발'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학문적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평화와 문학에서 노벨상의 문을 두드렸다. 과학상은 더 오랜 시간과 더 정교한 생태계를 요구한다. 다행히 한국은 총량도, 의지도 부족하지 않다. 연구 포트폴리오의 재조정, 평가 철학의 전환, 예산의 지속성 보장이 맞물릴 때 1990~2000년대에 뿌린 씨앗은 2030년대 초중반 '발견의 수확'으로 돌아올 것이다. 노벨상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다. 결과를 바꾸려면 과정을 바꾸어야 한다. 공학의 나라에서 발견의 나라로.
서용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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