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더 이상 변명은 없다
6만4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의 관중석이 텅 비었다. 파라과이와의 친선경기였지만 판매된 표는 2만2000장 남짓에 그쳤다. 한때 붉은 물결로 가득했던 그라운드가 이렇게 썰렁해진 이유는 단순히 '비인기 경기'여서가 아니다. 며칠 전 브라질전에서 0대 5로 참패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고, 팬들의 마음속에는 실망과 불신이 깊게 자리 잡았다. 지금의 대표팀은 신뢰를 잃고 있다.
브라질전의 대패는 결과보다 내용이 더 뼈아팠다. 수비 라인은 매 순간 흔들렸고, 중원은 상대의 압박에 속수무책이었다. 전진 패스는 막혔고, 공격은 무기력했다. 점유율은 높았지만 위협은 없었다. 경기 후 선수들의 표정에서는 자신감이 사라졌고 "이 팀이 과연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홍명보 감독 체제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감독으로서의 경륜은 충분하지만 최근의 리더십은 방향을 잃은 듯하다. 베스트11은 경기마다 달라지고, 전술은 일관성을 잃었다. 실험은 필요하지만 그 실험이 '혼란'으로 읽힌다면 곤란하다. 선수들이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하고,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뛰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다.
리더십은 전술보다 앞선다. 아무리 정교한 시스템이라도 구성원의 신뢰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최근 대표팀 내부에서 감지되는 불만의 기류, 경기 중 드러나는 무기력한 태도, 이 모든 것은 결국 소통의 단절을 시사한다. 감독이 선수들에게 '왜'를 설명하지 않고, 선수들이 지도자에게 '어떻게'를 되묻지 못하는 구조라면 팀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패스 성공률이 낮고, 연결이 끊기며, 2선에서 볼이 자주 끊기는 이유 역시 결국 조직력 부재다. 단순한 기술적 실수가 아니라, 전술적 약속이 사라진 결과다. 베스트11이 매번 바뀌는 상황에서 선수들은 서로의 위치와 타이밍을 익힐 기회를 얻지 못한다. 경기 중 눈빛만으로도 호흡을 맞추던 대표팀의 전성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체력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후반으로 갈수록 압박 강도가 떨어지고, 역습 상황에서는 수비 전환 속도가 늦어진다. 체력 관리와 훈련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낸다.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려면 유럽 클럽 수준의 데이터 기반 피지컬 관리가 필수지만, 한국 축구는 아직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리적 회복이 시급하다. 파라과이전에서 2대 0으로 승리했지만 브라질전의 대패는 선수 개인의 자존심뿐 아니라 대표팀이라는 브랜드의 신뢰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금 대표팀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첫째, 실험을 멈추고 핵심 라인업을 고정해 호흡을 다져야 한다. 둘째, 감독은 더 많이 설명하고, 선수는 더 책임감 있게 반응해야 한다. 셋째, 데이터 기반의 훈련과 회복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팬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팬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함께 울고 웃는 동반자다.
북중미월드컵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지금처럼 흔들린다면 본선 진출은 단순한 '통과의례'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의지가 있다면 위기는 오히려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상암의 빈 좌석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경기력 향상이 아니라 축구의 본질, 즉 팀워크와 신뢰, 소통과 열정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한 월드컵 준비의 시작이다.
이광호 기자 kw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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