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인하보다 중요한 건 실익"
투자 구조·통화 안정·비자 완화 관건
한미 관세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우리 정부가 제시할 요구안의 구체적 내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단순히 관세율 인하에 그치지 않고, 3500억달러(약 48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구조를 조정하면서 통화스왑 체결, 공정한 수익 배분, 비자 완화 등 실질적 이익을 확보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협상이 장기화할수록 한국이 어떤 조건을 얻어내느냐가 향후 산업 경쟁력과 금융 안정의 방향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5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김정관 장관은 지난 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협상 현황과 쟁점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 장관은 우리 측 수정 요구안이 전달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장관은 대통령실 긴급 통상현안 대책회의에 유선으로 참석해 회담 결과를 보고하고, 미국의 '선(先) 투자' 요구와 통화·비자 연계 문제를 논의했다. 대통령실은 "국익 최우선 원칙 아래 협상 주도권을 지키겠다"며 관세 완화뿐 아니라 금융안정 장치와 인력 이동 자유화를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투자 구조 조정이다. 미국은 한국이 제시한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보증 패키지를 '현금성 이행'으로 확정하길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재정과 외환 부담을 고려해 단계별 집행과 민관 분담형 구조로 조정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단일한 정부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라며 "우리 정부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현실적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화 스왑은 이번 협상의 또 다른 관건이다. 김 장관은 미국과의 상설 혹은 무제한 통화스왑 체결을 관세 완화의 핵심 조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막대한 달러 유출이 불가피한 투자 약정을 뒷받침할 유동성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통화스왑은 단순한 외환 거래를 넘어 양국 간 신뢰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체결된 한미 300억달러 스왑은 한국 외환시장의 급락세를 멈추게 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현재 상설 스왑 라인은 없는 상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번 협상을 계기로 외환위기 대응 수준의 금융 안전장치를 다시 구축하려 하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것보다 상설 스왑 체결이 한국 금융시장 신용도를 끌어올리는 실질적 조치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수익 배분 구조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미국 측이 제시한 초안에는 투자 수익의 대부분을 자국 기업이 우선 배분받는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자금과 위험을 부담하면서도 수익은 제한되는 불균형 구조다. 정부는 "공정한 배분이 보장되지 않는 한 협상 의미가 반감된다"며 구조 재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 장관도 "이번 협상의 목적은 단순한 관세 인하가 아니라 산업의 구조적 이익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비자 문제 역시 우리가 반드시 받아내야 할 조건이다. 첨단 산업 현지화를 위해 우리 정부는 미국 측에 전문직(H-1B)과 기술직(E-7) 비자 쿼터 확대, 절차 간소화를 요구하고 있다. 반도체·배터리·AI 등 주요 산업의 미국 내 공장이 늘면서 한국 기술인력의 체류 제약이 커졌기 때문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비자 완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투자의 의미도 절반에 그친다"고 말했다.
정부는 오는 APEC 정상회의를 협상 전환점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관세·투자·스왑·비자 등 복합 의제를 아우르는 포괄 합의를 목표로 한다. 다만 미국 내 보호무역 기조가 강화되고 있어 단기간 내 타결은 쉽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세종=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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