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6일 열릴 예정이던 고급 과학기술 인재 확보 관계장관회의를 순연했다. 국정감사 준비 등에 밀려 회의가 보류됐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이번 회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H-1B 비자 수수료를 연간 10만달러(약 1억4100만원)로 대폭 인상한 이후 정부의 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최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글로벌 이공계 인력의 국내 유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각 부처에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정부가 고급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준비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곳곳에선 이미 'H-1B 리스크'를 기회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영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는 "H-1B 혼란 이후 주말 동안 세계 최고 대학 컴퓨터공학 졸업자들로부터 1000건 이상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전 세계가 미국에서 밀려나는 인재를 잡기 위한 유치전에 뛰어든 모양새다.
우리의 현실은 다른 국가들과 온도차가 있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매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한국인은 400~600명, 박사후연구원은 약 4000명, 대학·연구소에서 활동하는 한국 국적 연구자는 약 8000명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H-1B 규제 영향을 받는 연구자는 전체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게 정부 분석이다. 인재 유턴 반사이익이 있다 해도 그 폭은 생각보다 좁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외국인 인재를 데려올 순 있을까. 업계의 시각은 냉정하다. 조준희 한국AI·소프트웨어협회장은 "미국은 지금 AI 인재에게 수백만 달러를 들여 데려가는데, 10만달러 비자 수수료가 시장 판도를 바꾸긴 어렵다"며 "웬만한 고급 인재가 100만달러 이상을 받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 비용은 미미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IT 대기업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비자 비용만으로 인재가 이동하지는 않는다"고 일축했다.
정부도 합당한 처우와 연구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의 본질임을 알고 있다. 해외 인재 유치 사업 예산을 늘리고 대학·연구기관과 연계한 유치 체계를 구축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말과 실행의 간극은 여전하다. 인재 확보를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 외치면서도 국감 준비 때문에 회의를 미룬다는 설명은 성의가 부족해 보일 수 있다.
미국 비자 규제 강화로 반사이익만 기대하는 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최고급 인재일수록 비자 수수료 부담은 미미하다. 국내 연구 환경의 질적 개선을 위한 정부의 노력, 인재 유치를 위한 기업의 적극적 투자, 이공계 인재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인재 유출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의 경쟁력을 키우는 근본 과제를 따져봐야 한다.
박유진 기자 geni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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