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권 명목 권력분립 붕괴 우려
민주주의 원칙 따른 정치권 개혁부터
대통령의 선출 권력 우선론과 권력 서열 발언은 파장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여권 일부에서는 국민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다며 대통령의 발언을 수습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사법부를 압박하며 특별법을 추진하는 집권여당의 기세는 여전하다. 대의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원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지난 취임 100일 기자회견 당시 대통령의 발언을 확인해 보자. "국민의 뜻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선출 권력들이다. 임명 권력은 선출 권력으로부터 2차적으로 권한을 다시 나눠 받은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에는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 최고 권력은 국민이죠? 국민 주권. 그리고 직접 선출권력, 간접 선출권력. 그런데 이걸 우리가 가끔 망각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 서열이 헌정질서가 만들어지는 순서일 순 있지만, 권력의 서열은 아니다.
우리가 제헌의회를 구성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면 이런 순서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구축된 민주공화국 체제에서 선출된 권력이다. 법치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규정 받는 대의 권력이다. 권력이 빌리는 국민주권론은 자칫 이런 헌정질서를 넘어선 권력의 자의적 도구로 활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국민의 대표자를 뽑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정부를 운영하는 원리다. 선거를 통해 뽑힌 대의 권력이 전제 군주와 같이 전권을 위임받은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 체제의 헌정질서가 규율한 대로 제한적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대의 권력 스스로도 취임 선서를 통해서 다짐하고 확인하는 바다.
최초의 법치 체계는 입법부가 주도하지만, 입법부 또한 국민의 합의를 통해 구축된 헌법 질서와 법치에 따라야 한다. 법치주의의 핵심은 국민이 지켜야 할 법질서 차원보다는 법으로 규율된 권력 행사에 있다. 그래서 법치를 주도하는 행정, 사법부를 입법부와 구분해 서로 견제하면서 법치가 객관적으로 관철되도록 하고 있다. 권력분립 체제다.
흔히 입법, 행정, 사법을 구분하는 3권분립을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주도하는 행정과 입법부가 융합된 체제다. 대통령 권력과 분립돼 있다는 입법부가 실제는 대통령 소속 여당과 이에 맞서는 야당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한국의 권력분립 구조는 그나마 사법부의 독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법부를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개혁하겠다고 입법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나서고 있다. 법치주의 체계의 핵심인 사법부를 정치권이 좌우한다면 그나마 한국의 권력분립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이 된다.
선출직 권력 우선론을 내세우지만, 선출권력이 무조건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게 아니다. 선출권력도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그게 선출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다. 국민주권의 원칙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파면되는 헌정질서에 박수를 보내지 않았던가? 권력자들이 내세우는 국민주권론이 대부분 제도를 넘어선 포퓰리스트적 독재에 동원되었던 점을 경계해야 한다. 인민의 이름을 빌렸던 공산 독재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근래 남미의 독재자들이 썼던 일상적 구호도 인민(El Pueblo)이었다, 국민주권론은 권력의 정당화 도구가 아니라 권력에 대한 비판 구호일 때 민주적 기반이 된다.
선출권력 우선을 내세울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이를 토대로 한 헌정의 원칙이 기준이다. 품격은 떨어지고 완장만 휘두르는 요즘 우리의 대의정치 권력이다. 사법개혁, 언론개혁을 말하기 전에 정치권 스스로의 개혁이 시급한 시절이다.
김만흠 전 국회입법조사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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