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LH 전직 고위 간부 인터뷰
"공기업 철학 다시 세울 때"
"현재 LH의 문제는 자재나 브랜드가 아닌 공기업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철학의 부재'에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시행하고 민간 건설사에 주택 품질을 맡기겠다'는 국토교통부의 9·7 대책에 대한 LH 전직 고위 간부가 내놓은 날카로운 지적이다. 아무리 좋은 자재를 쓰더라도 운영 주체의 원칙과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품질 개선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전직 간부는 정부가 추진하는 '민간참여사업 확대' 방안에 대해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그는 "공공 현장에서 건설사 최고경영자(CEO)의 머릿속에 품질은 첫 번째 우선순위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낙찰 여부와 그에 따른 수익성"이라며 "발주처인 LH가 품질 관리의 주체로 바로 서지 않는 한 민간 건설사는 비용 절감을 위해 품질을 후순위로 두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민간 자재를 쓴다고 해서 품질이 저절로 담보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는 "민참 사업 확대는 공공주택 품질을 일정 수준 '상향 평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다. 최악의 현장은 줄어들 것"이라면서도 "그것이 LH 품질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발주처인 LH가 스스로 품질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내부 조직과 전문 인력을 갖추지 않는 한 민간에 대한 의존은 결국 '책임의 외주화'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LH가 직접 시행을 하려면, 내부에 품질관리(QC)를 할 수 있는 인력 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고 그냥 민간에 던지기만 해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민간 건설사가 자체 사업으로 아파트를 지을 때는 '최고 품질→최고 분양가→최대 이윤'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품질에 투자하는 것이 곧 회사 이익으로 직결된다. 그러나 LH의 도급형 민참사업에서는 건설사의 수익이 '정해진 공사비 내에서의 시공 이윤'으로 고정된다. 이 구조에서는 '최소 비용→최대 이윤'이라는 공식이 작동한다. 계약을 넘어서는 추가적인 품질 향상 노력은 회사의 이윤 감소로 이어진다. 브랜드 평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품질을 맞추고 최대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 이득이다.
아무리 1군 건설사라 하더라도 LH 사업에서는 정해진 공사비 상한과 설계 시방서, LH의 가이드라인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자체 사업처럼 과감한 고급 자재 투입이나 공법 변경이 어렵다. 결국 최종 결과물은 '래미안'이나 '자이'의 고급 단지가 아닌 'LH 기준에 맞춰 지어진 래미안·자이'가 되는 것이다. 이 전직 간부는 "LH의 감독 시스템이 허술하고 담당 직원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민간 건설사는 얼마든지 기준의 빈틈을 파고들어 원가를 절감할 여지가 생긴다"고 부연했다.
그는 LH가 품질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근본 원인으로 정체성 혼란을 꼽았다.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 통합 이후 개발 사업의 수익성이 조직의 최우선 과제가 되면서 본연의 임무가 뒷전으로 밀렸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발 부문이 선행 단계 의사결정을 주도하면서 설계·건설 관리·품질 관리 같은 후행 요소는 늘 뒷순위로 밀려났다"고 했다. 또 "국민이 LH에 '사업 잘해서 돈 벌어라'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다. 국민은 '좋은 집을 지어 내가 쾌적하게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전직 간부는 "서민을 위한 주거를 짓다 보면 적자가 생길 수밖에 없고, 이는 국민을 위한 '선(善)한 적자'"라며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이 손실을 이유로 LH의 본래 역할인 '좋은 집' 짓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재무 건전성을 앞세우는 순간 가장 기본적인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근본적으로는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설계·시공·품질 관리 전문가를 집적한 '주거청'을 신설해 국가 차원의 품질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안정적인 주택 공급과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품질을 동시에 보장하려면 주거청과 같은 전담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서윤 기자 s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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